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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드라마리뷰

추노, 이대길 죽일 자 결국은 송태하다

by 뷰티살롱 2010.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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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채널의 인기 수목드라마 <추노>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쉽사리 그 결말이 어찌될지는 예측하기가 어렵기만 해 보이기도 하는데, 극중 이대길(장혁)은 죽음을 맞게 될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게 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만 갑니다.

일부에서는 이대길이 죽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라고 봐야 할 듯도 한데, 개인적으로도 이대길이 마지막에는 죽음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생각이 들더군요. 왜 일까요? 개인적인 평가일 수 있지만, 인기드라마 <추노>는 단순하게 도망노비를 찾아 추쇄하는 액션 활극의 장르를 선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시대 성행했던 도망노비의 실체를 통해 시대상을 조명하고 있는 드라마라고 보여집니다. 일종의 사극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전란으로 인해 사회는 혼란기를 맞고 있을 시대였고,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민초들은 남의 아래, 부자들의 아래로 스스로 굽히고 들어감으로써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병폐는 농업이라는 사회상을 놓고 볼때, 노동력이 와해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통해 노예를 만들어놓고 빈농들은 그러한 부자들에 의해 자신을 잃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죠.

드라마 <추노>는 전란을 겪고 난 전후세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조 15년 외세의 침략으로 왕이 직접 무릎을 끓은 사건인 삼전도의 치욕을 겪게 됨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종의 청나라에게 신하의 나라로써 자리하게 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국가적으로 하나의 속국이 되었음을 나타내 보임과 동시에 드라마 <추노>의 본 이야기인 노비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죠. 조선에서는 왕이었지만 인조(김갑수)는 조선사회에 양민에서 천민계급으로 전락해버린 노비의 신세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나라가 힘이 없어 외세에게 침략을 당하게 된 조선은 하나의 노비같은 굴레를 짊어지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듯 해 보였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는 <추노>의 이야기가 일종의 도망노비와 노비를 쫓는 추노꾼의 모습으로 시작되었던 데에는 이러한 국가적인 상황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같은 나라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보통의 이야기일 수 있을 듯 합니다. 시대적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노비로 전락해버린 백성들의 고단한 이야기가 다름아닌 <추노>라는 드라마라 할때, 이대길은 시대를 대변하는 캐릭터라 할 수 있습니다. 양반이지만 양반이 아닌, 소위 몰락양반의 신분이 된 이대길은 자신의 집 종이었던 언년이(이다해)와 그의 오라비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한 비운의 인물이죠. 양반이기는 하지만 양반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이대길은 어찌보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의 왕이기는 하지만 청의 외압에 시달리는 인조의 모습과 닮은 듯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 이 지랄맞은 세상"

대길의 말 중에는 이러한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뒤바뀌지 않은 이상이야 노비는 노비이고, 양반들이나 권세를 휘두르는 권세가들은 힘없는 양민과 노비들을 쥐어짜내는 세상이죠. 포도청의 하급관리조차도 심심찮게 주막에서 갈취돈을 뜯어내는 모습을 보더라도 조선시대 전락의 뒷모습은 비리와 가난의 한가운데에 있는 모습이죠. 그러한 시대속에서 이대길이 살아가는 방법은 세상속에 동화되어 흘러가는 것이겠지요. 지지리 무술실력도 없던 이대길은 짝귀(안길강)와 천지호(성동일), 그리고 숭례문 개백정인 명암스님에게서 무술을 배우고(배웠다기보다는 맞아가면서 습득했다고 해야 할듯합니다), 몸뚱아리 하나로 살아나가는 법을 터득해 나간 인물로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대길의 심중에는 비록 지랄맞게 살아가는 자신이기는 하지만 자존심하나만은 죽지 않았죠. 그렇기에 양반네들에게 쉽사리 무릎을 굳히지 않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도망간 노비들을 잡아오지만, 그들이 싫다면 그들을 도망시키는 것 또한 서슴치 않는게 이대길이라는 캐릭터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그들을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의지가 노비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도망시켜 짝귀의 소굴로 보내곤 했었으니까요.

드라마 <추노>는 이제 마지막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원손을 살리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송태하(오지호)는 처음부터 원손을 살리고자 하는 한가지 목적만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 즉 왕권을 뒤바꾸는 일을 도모하고자 했었습니다. 바로 세손인 소현세자의 직계인 원손 석견을 옹립하고자 했었던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원손을 보위에 올리고자 하는 명분내부에는 그들만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려는 혹은 또다른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게 되었죠. 원손 석견을 왕위에 옹립하고자 하는 것에서 송태하는 이제는 살리고자 하는 원초적인 의무감만을 지니게 되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살귀로 변한 황철웅(이종혁)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싹~

역사적으로 인조의 뒤를 잇게 되는 이는 다름아닌 봉림대군입니다. 드라마 <추노>에서도 등장한 봉림대군은 인조와 같은 노선을 걷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각기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소원하는 것을 말하라고하자 소현세자는 용연석(벼루인가요)을 요구했었고, 봉림대군은 붙잡혀온 조선백성을 요구했습니다. 드라마 <추노>에 깔려있는 과거 역사의 흐름속에 남아있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두가지 견해를 내포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다름아닌 문물의 개방과 국력의 개선이라고 할 수 있겠죠. 소현세자는 외세의 앞선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인조는 자체적인 자생력으로 치욕스러움을 뒤찾아야 함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왕의 의중은 청나라 사신인 용골대(윤동환)와의 대치로 나타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조가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조의 이을 만한 왕이 후대에 있어야 함이 당연지사겠지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봉림대군은 인조의 후계로 낙첨이 될만한 위치와 뜻을 두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선격의 존재는 인조의 국력강화 의지를 지저하는 세력들이 활개를 치게 하는 버팀목이나 다름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드라마 <추노>의 역사적인 모습을 고려해본다면, 인조의 뜻을 따르고 있는 이경식 대감은 결단코 악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대길은 어찌될까요?
드라마 <추노>를 지금까지 시청해온 애청자들이라면 드라마 <추노>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과 함께 다수의 눈에 띄는 모습들이 많음을 직감하게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름아닌 등장인물의 신체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죠. 그중에서 유독이 손에 의한 디테일한 부분들을 포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송태하가 천지호의 화살을 맞고 사경을 헤매는 과정에서 과거 호란속에서 죽음을 당한 자신의 자신과 부인을 애타게 찾던 모습이나, 혜원이 이대길의 표검을 맞고 동굴안에서 환영속에서 애타게 쫓던 씬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모습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애타는 모습이었죠.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여태껏 죽어갔던 사람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는 모습이 많이 보여졌습니다. 백호의 죽음에서도 혜원의 그림을 애달게 잡으려는 손놀림이 디테일하게 보여졌던 모습도 있었죠.

이를 생각해본다면, 드라마 <추노>에서는 송태하와 이대길, 혜원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캐릭터가 아닌 상징를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고 보여집니다. 먼저 송태하는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양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급진적인 개방을 부르짖는 양반이었건, 아니면 폐쇄적인 자주적인 부국강병을 부르짖는 부류에 속해있건 일종의 양반이라는 지배층이 지닌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준 캐릭터였죠. 처음에는 임영호 대감을 중심으로 원손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으로 비춰졌지만, 동료들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력을 잃어버리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지닌 송태하라는 인물은 세력을 잃어버렸다 해서 기본적인 의식조차도 버리지 않는 오리지날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뜻이 꺾였지만, 원본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지막 의무감은 저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원손을 살림으로써 그 자신은 죽음과 거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길.
그는 세상에 미련이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그 시대에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내기의 전형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추노질을 하지만 한가지 그가 이루려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언년이를 찾아내는 것이었죠. 그것이 이대길이 살아가는 것이었고, 살아남는 의미였죠. 하지만 다시 찾은 언년이는 이미 언년이가 아닌 송태하와 혼례를 치른 상태의 남의 여자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말 그대로 지랄~같은 세상이라고 하달밖에요. 좋아하는 사람과 짝사람도 아닌 서로가 좋아하는데도 함께 있지 못하는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죽을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없는 이대길이지만, 송태하에 의해, 혜원에 의해서 이대길은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원손 석견의 생사에 대해서 송태하와 또다시 한양으로 동행했기 때문이죠. 봉림대군과의 만남이 이어졌고, 곧이어 황철웅과의 대치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대길이라는 캐릭터가 쉽게 죽을 수는 없어 보입니다.
 

여기까지 진행된 모습에서 볼때, 원손을 둘러싸고 이대길과 송태하는 한배를 탄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먼곳을 바라보게 되면 왠지 송태하와 이대길은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며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왜였을까요. 다름아닌 송태하과 봉림대군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조의 치세하에 있는 조선의 왕궁에는 청나라 사신인 용골대가 찾아왔습니다. 다름아닌 원손 석견을 데려가기 위해서였죠. 이유인즉 안전을 위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말로 한다면 볼모를 만들기 위해서였겠죠. 조선의 왕족을 데려감으로써 청의 신하된 예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입니다. 석견을 둘러싸고, 조선에서는 죽기를 바라고, 청나라는 안전을 바라는 모습이죠. 그래야만이 봉림대군의 정치적 행보에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청나라와의 치욕적 관계를 청산해 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송태하는 조정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걸림돌이나 다름없습니다. 용골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송태하는 원손을 용골대에게 넘기려는 의도는 없어 보입니다. 함께 돌아가자던 용골대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봉림대군과의 만남은 작게는 원손 석견을 살리는 것이지만, 국가적으로는 원손을 사이에 두고 조선조정과 청나라 사신간의 힘겨루기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봉림대군이 왕위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숨어있는 포석이 필요하게 될 듯 보여집니다. 용골대와 한번 싸움을 한 바 있는 송태하는 결국 용골대에 의해 조선조정을 압박하려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이대길은 그를 막기위해 맞서 싸우게 되는 상황에 처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떻게....
용골대의 회군이라는 점이겠지요. 봉림대군은 원손을 보호해줄 수 있는 명분에 대해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용골대는 조선의 백성과 원손의 안위를 위해 함께 돌아갈 것임을 조선조정에 전하게 될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포로들 중에는 짝귀의 소굴인 월악산 산채의 사람들이 붙잡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태하는 혜원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은 모습이겠지만, 이대길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안전을 위한 송태하의 결심과 백성들이 볼모로 잡혀가게 되는 것을 막게 되는 이대길의 대치는 청나라 사신 용골대와 조선조정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피튀기는 대립으로 묘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결말은 극히 조심스러운 예상일 뿐입니다. 인기 드라마 <추노>를 그저 액션활극 퓨전사극의 장르로 보기보다는 역사적 관점에서 유추해 내서 생각해 볼때, 이대길과 송태하라는 캐릭터는 인조집권기의 혼란스러운 조선사회를 보여주는 사극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군요. 한가지 더 이대길의 죽음이 예상되는 것은 지난 회차에서 짝귀의 소굴에서 다시 만남 소녀와 이대길에 의해서 다시 풀려난 도망노비들간의 재회장면 때문이었습니다.


첫회에서 도망시켰던 어린 여종을 탈출시키는 장면에서 디테일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손을 맞잡는 장면은 드라마 <추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지랄맞게 사는 인생이라고 떠벌이며 노망노비들을 추쇄하는 이대길이지만, 그에게는 추노라는 현실의 생활과, 그들의 아픔을 해방시켜주는 손놀림의 이상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아저씨 안 잊을께요"
짝귀의 산채에서 다시 만난 계집아이 노비와 많은 수의 노비들은 웃으면서 이대길에게 감사의 모습을 전했습니다. 잡혀오기는 했었지만, 다시 안전하게 풀어주어서 마음깊이 감사하는 모습이었죠. 어찌보면 이대길이 꿈꾸던 그런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었지만, 이대길의 죽음을 알려주었던 모습과도 같았었죠. 잊지 않겠다는 계집아이의 말처럼 이대길은 핍박받은 노비들(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 아닐까 하는 결말이 퍼득 떠올랐습니다.
다시는 붙잡히지 말고, 꼭꼭 숨어서들 살아, 여차하면 싹 잡아다가 다시 관아에 넘길테니까 라는 이대길은 말은 일종에 조선의 권력다툼으로 어수선한 조정과 청나라 사신과의 대치를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어이~ 나라 좀 든든하게 지켜, 안그럼 다시 쳐들어와서 조선 백성들 싹 잡아서 청나라로 끌고갈 거니까. 라고 들렸습니다.
<추노>의 결말이 어찌될 것인지는 모르죠. 이대길과 송태하가 살아남을 것인지, 죽을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보여온 <추노>의 모습이라면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이 예상되기만 합니다. 두 마초같은 남자, 이대길과 송태하는 죽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언년이이자 혜원은 살아남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송태하의 자식을 갖게 됨으로써 말이죠. 송태하에게 혹은 이대길에게 언년이는 하나의 이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죠. 비틀거리듯 언제 또다시 외세인 청나라의 침략에 혼란을 겪어야 될지 모를 조선의 모습이나, 노비지만 양반이었던 송태하와 천민같은 삶을 살아온 양반추노꾼 이대길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혜원은 두 남자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아있는 희망이자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이기 때문이겠죠. 그들을 기억하라 라는 말이 언뜻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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