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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드라마리뷰

추노, 남자-여자, 아이를 통해 희망을 그린다

by 뷰티살롱 2010.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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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의 신분에서 스스로가 인간임을 자각하게 된 업복(공형진)은 초복이의 의도하지 않은 결혼으로 인해서였습니다. 그분(박기웅)의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면서도 늘 세상이 바뀌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겁니까 라고 되묻곤 했었던 인물이 관동포수 업복이였었죠. 세상을 지배하는 양반들을 죽이고 뒤엎어진 세상에는 노비들이 양반들을 부리는 세상이 된다는 희망을 꿈꾸었었죠. 그렇지만 업복이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세상이 된다 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신분이라는 굴레의 수레바퀴는 존재함을 알았었습니다. 양반이 노비가 되고 노비가 세상을 주무르는 세상이라 하지만, 권력자와 지배층이 뒤바뀌었을 뿐 실상은 남을 지배하고 남에게 속박되어 있는 고단한 인간세상에 대한 끝모를 의문점을 품고 있었던 캐릭터였죠.

업복이는 초복이의 뜻하지 않은 결혼으로 노비가 아닌 한 인간임을 자각하게 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간데, 사람을 사고팔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분노를 표출해 냈습니다. 그 분노는 그동안 자신이 총으로 쏘아죽였던 양반들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양반들을 총살한 것은 그분의 계략에 의해 노비들을 지배하는 양반들을 하나씩 제거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초복이의 상전을 죽인데에는 업복이의 분노가 담겨있었던 때문이었죠. 그리고 업복이를 찾아 둘만이 숨어지내자며 자신의 속내를 밝힙니다. 초복이(민지아)는 그런 업복이에게 세상은 누가 바꿀 것인가를 반문했습니다.

드라마 <추노>가 이제 마지막회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어느정도 가름해 볼 수 있을 법해 보이기도 합니다. 노비당을 이끌던 그분(박기웅)의 실체는 다름아닌 권력자인 이경식 대감(김응수)의 수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노비당을 선동하며 그동안 정체에 대해서 여러모로 추측했었던 바가 많았었는데, 역시나 블로거분들이 추측이 80~90%는 맞아떨어진 모습이기도 했었죠. 김응수 대감은 인조의 북벌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선혜청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하나의 민란으로 공론화시켜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대대적인 호적을 정리하고 국방으로 노동력을 이전시킴으로써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놓는다는 것이었죠.

이경식 대감에 의해 이루어진 일련의 계획들을 들여다볼때, 두명의 인물이 눈에 띄이더군요. 한때 반대편에 서서 혁명을 꿈꾸며 원손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했던 조선비(최덕문)와 노비당을 이끌고 선혜청을 들이닫쳤던 그분입니다.



처음부터 이경식 대감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는 인물이 아닌 조선비는 송태하(오지호)와 같은 뜻을 두고 있었던 캐릭터였습니다. 소현세자의 원손 석견을 왕위에 앉힘으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했었죠. 하지만 조선비는 보기좋게도 이경식 대감의 사탕발림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힘을 자신이 실어주겠다는 감언이설로 배신자가 되게 된 모습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노비들에게 그분으로 통하는 남자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이경식 대감의 수족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노비들을 선동하고 선혜청까지 들이닥치며 거사를 한 것처럼 꾸며놓았습니다. 이경식 대감을 찾아간 그분은 이경식 대감에게 드러내놓고 권력에 대한 댓가를 요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두 인물은 결국 이상이나 신념이 아닌 권력과 지배층이 되고자 한 모습이었죠. 배신이니 변절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수식어가 필요없이 조선비 또한 자신이 바라던 것은 다름아닌 권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그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서 수단이 되어버린 원손을 택했던 것이었지만, 계획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이경식 대감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드라마 <추노>는 일종의 희망을 노래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안되는 일인줄 알면서도 마음만이라도 끊임없이 갈망하는 듯한 모습이죠. 이대길(장혁)은 십여년간을 언년이(이다해)를 찾아서 추노질을 했습니다. 자신이 마음속에 두었던 여인이었던 언년이를 찾아서 도망노비를 찾아 추노질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혜원이 된 언년이, 송태하의 여인이 된 언년이를 매일 보게 되었지만, 즐겁다기보다는 오히려 죽을 맛입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여인이 앞에 있지만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가 않습니다.

관동포수 업복이는 어떠할까요. 노비가 싫어서 도망을 했던 업복이는 추노꾼 이대길에게 잡혀 다시 한양 양반 주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업복이는 같은 여자노비인 초복이를 만나게 됨으로써 아련하게 마음한켠으로 초복이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초복이의 존재에 대해서 자각하게 된 업복이는 결국 초복이를 찾아 주인양반을 죽이고 도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초복이의 말 한마디에 초복이만을 먼저 보냅니다.

양반이었지만 노비로 전락한 송태하는 소현세자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달렸습니다. 제주도에서 원손 석견을 찾아 뭍으로 나왔지만, 황철웅(이종혁)에 의해 같은 희망을 노래하던 동료들을 하나둘씩 잃었죠. 자신이 희망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시작된 마라톤의 끝은 허망한 비극이나 다름없는 모습처럼 보이기만 합니다. 동료들은 죽고, 남아있는 카드는 다름아닌 청나라로의 망명이었습니다. 그 끝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찌보면 슬픈으로 가득차 보이는 듯해 보입니다.

스스로 살귀가 되어버린 황철웅 또한 어찌보면 그의 삶은 고단하기만 한 캐릭터도 그가 희망하는 세상은 친구였던 송태하가 상관이 아닌,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송태하를 따르는 부하들의 충성심이 시기심으로 생겨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이지만, 아픈 노모와 가난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황철웅 자신은 어떠한 비열한 짓을 해서라도 성공해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렇듯 드라마 <추노>의 중요 인물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희망은 있으나 그 희망은 요원하기만 하는 신기루와 같은 모습들이 아닌가 싶더군요. 자신들이 쫓는 것이 사랑이었든, 아니면 권력이었든지 간에 현재의 삶속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힘겨워만 보인다는 얘기죠. 업복이와 초복이의 노비키스가 슬퍼보이는 까닭이 어쩌면 그러한 이유였던가 봅니다.

그런 반면 드라마 <추노>는 서로 다른 세상이 보여지는 듯해 보입니다. 남자들이 세상이 어지럽고 고단스레 보이는 현실같은 모습이었다면, 드라마 추노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고단스럽지만 그나마 살만한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업복이에게 세상을 바꾸라며 눈물로 보내는 초복이나, 송태하를 기다리는 혜원, 대길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희망하는 설화(김하은) 마지막으로 최장군을 사모하는 작은주모에 이르기까지 삶은 고단스럽지만 여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교사상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시대에는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이 다름아닌 남자들을 통해서였을거라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이경식 대감이 줄곧 등장하는 기방에서도 늘상 옆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기방의 여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의 고단함과 달리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이는 누구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마초같은 남자들도, 남자의 사랑을 기다리는 여인들도 아닌 이제 갓 세상을 보게되는 아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주도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 소현세자의 아들인 석견은 결국 도망노비들이 모여산다는 월악산 비봉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는 대길에 의해 구출되었던 은실이(주다영)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첫회에서 아주 짧게 모습을 보였던 은실은 월악산 짝귀의 산채에서 밝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죠. 원손 석견과 은실이의 모습을 보면서 드라마 <추노>는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여인들을 통해 현실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을 통해서 희망을 꿈꾸는 드라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미 굳어질데로 굳어진 어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희망을 이야기하죠. 그 희망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던, 아니면 단지 권력을 얻기 위함이었든, 부를 얻기 위함이었든, 사랑을 얻기 위해서였든 현실의 고단함을 끌어안고 희망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바뀔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신념이 되는 것이죠. 이경식 대감의 희망은 희망으로 끝나야지 신념으로 변하는 안된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은 없을 듯 합니다.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신념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이나 다를바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깨어있지 않다면 희망에서 신념으로의 전환은 어렵습니다. 노비당이 몰살을 당한 것은 희망은 있으되 신념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아는 바가 없는 노비들의 봉기는 단지 그분의 말에 따랐을 뿐, 누구하나 세상이 변한다는 데에 신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월악산 짝귀의 산채에서 설화는 글을 배웁니다. 그녀가 글을 배우는 이유는 혜원을 닮아가기 위함이었죠. 한때 사당패에 있었지만, 대길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한 남자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길에게는 이미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언년이라는 여인이었죠. 설화는 혜원을 닮기위해서 언문을 배워나갑니다. 그것이 어쩌면 대길을 향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희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추노>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왠지 모를 그 희망이라는 것이 삽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길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모습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꿈같은 희망이지만, 자식과 자식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을 통해 희망에서 끝나지 않게 되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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