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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드라마리뷰

선덕여왕 29화, 미실의 환상론보다 덕만의 희망론이 두려운 이유

by 뷰티살롱 2009.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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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MBC 선덕여왕>

인기드라마인  MBC의 <선덕여왕> 중심이 비담이나 알천 등에서 비로소 본 주인공으로 촛점이 맞추어진 듯 한 모습이다. 일식을 기화로 덕만은 미실을 완벽하게 속이며,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고 신라 계림의 공주로 탈바꿈했고, 남장에서 본연의 모습인 여장으로 바꾸었으니 말이다.  본격적인 두 미녀 여배우의 연기대결이 본 괘도에 오른 셈이다.

29화에서 신라궁으로 입성한 덕만은 성골신분이라는 막대한 권력을 손에 거머쥐었다. 성골이라는 신분 자체만으로도 덕만(이요원)은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된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미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공주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계획한 일은 다름아닌 첨성대 건립이었다. 이는 그동안 신라라는 고대국가에서 근간을 이루던 모태신앙이라 할만한 미신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자연의 현상과 변화에 민중의 동요가 발생하고 이를 무기로 권력자들은 민간신앙과 미신을 통해 힘을 기를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상천관이라 불리는 신관의 권위가 높을 수 있었던 계기였을 수도 있다.

미신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의 전환점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여진 첨성대의 의미는 한마디로 그동안 인식되어 오던 민간신앙, 즉 미신의 시대에서 새롭게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것, 하늘을 읽는다는 것은 곧 삼라만상에 대한 이치를 깨닫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천신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해가 기울어지고, 달에 차고 바람이 불어오고 24절기가 돌아오는 것이 천체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즉 신적 존재에 의해 주관되어 오던 하늘을 사람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실(고현정)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상 과학의 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 과학이라는 것이 드러내있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초인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마련이다. 마술쇼를 처음 접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상자에 들어간 사람에게 칼을 꽂아도 이상이 없는 모습은 신기에 가깝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술의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하나의 트릭에 지나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놀랍거나 신기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미실의 과학은 신라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라 할만하다. 이는 백성들의 무지에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겠지만, 과학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것으로만 소유하게 된 미실의 통치철학이나 다름없다. 즉 민중은 두려움을 느껴야만 복종하게 되는 철의 정치학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에 비해 덕만의 정치는 과학의 정치다. 과학은 널리 공유해야만 한다는 게 덕만의 이치다. 즉 과학을 통해 경제적 소산을 높여나감으로써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한 사람의 부는 국가의 부나 다름없고, 개개인의 생산력을 높여나감으로써 국가적 자산을 늘려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실의 세계와 덕만의 통치학은 미신이라는 허상과 과학이라는 실존의 충돌이나 다름없다 할만하다.

정치와 공약이 국민들에게 주는 환상

29화에서 덕만과 미실의 대치를 극점으로 끌어올린 부분은 두 사람이 마주앉아 선문답을 하는 모습이라 할만하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게 명백히 다른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를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선거와 그 선거에 사용되는 각종 공약들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었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될 시기에 항상 찾아오는 것은 다름아닌 각 정당에서 내세우는 선거공약이다. 자신들을 뽑아준다면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사업을 해 나갈 것이며, 빼놓지 않고 내세워지는 공약이 민생안정이라는 부분이다. 어디에도 정치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공약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발등을 찍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선거의 공약은 일종의 환상이나 다름없다. 국민들에게 있어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공약이 100%의 현실성이 없다 하더라도 단 몇십%의 현실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게끔 만들어놓는 것이다. 즉, 일종의 환상정치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민중은 실상 허상이라 하더라도 환상을 좋아한다. 이러한 환상에 안주하는 모습은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 결과라 할만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기 때문에 만족감을 100% 채워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는 더 잘 살기 원하고, 누구보다는 특별해야 하고, 누구보다는 더 많이 배웠으면 하는 게 민중이라는 얘기다.

그에 비해 덕만의 정치학은 희망을 거론한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민들에게 정치란 하나의 희망이나 다름없다. 현실보다는 더 나아진 삶을 원하고 그 원하는 부분은 하나의 희망이다. 지금보다 더 아나가려는 마음이 곧 희망인 셈이다. 

그렇지만 얼핏 보기에 환상정치와 현실정치를 볼 때, 미실의 환상론과 덕만의 희망론을 비교해볼때, 그 차이는 사실상 종이 한장의 간격보다 더 좁다. 그 정치이론은 사실상 비일비재한 모습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할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미사여구, 즉 환상이라는 단어와 희망이라는 단어의 차이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볼 때, 과연 희망론이 환상론에 비해 더 좋기만 할까? 영화 위숍스키 형제의 디지털 미학이라 할 수 있는 영화 <매트릭스>는 하나의 환상이다. 사람들은 매트릭스 속에 살면서 허상을 채워나가지만 실상 자신의 실체는 아니다. 즉, 환상의 세계라는 얘기가 된다. 희망이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매트릭스라는 세계를 빠져나와 현실세계를 접하게 된 사람들은 일순간 암울한 미래세계를 만난다. 그 암울함속에서 기존 매트릭스안에서 자신이 누리던 이상과 권력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인간의 모습 그 자체만 지닌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트릭스안에서 누렸던 환상적인 세계에 대한 화려하고 권력적인 세계를 동경한다.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하나의 희망인 셈이다. 즉 현실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는 의지속에 희망은 존재하는 셈이다. 의지가 없다면 즉 희망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환상만이 존재한다.

미실과 덕만의 선문답을 들여다보면 환상주의 미실의 주장보다 오히려 희망론의 덕만의 말이 더 달콤하고 마음이 솔깃한다. 왜냐하면 환상이란 자체는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라는 부분을 통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희망론에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미래의 꿈이라고도 말하는 희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라는 희생이 따른다. 민중에게 더 나아가는 세상을 얻기 위해서 희망을 얘기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 자체는 하나의 덫처럼 현재 상황에서는 희생을 강요당하기 마련이다. 그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결과물은 없기 때문이다.

즉 덕만의 희망론은 민중에게 고통을 감내하라는 것과 같다. 미래의 꿈, 보다 나아지는 세상을 얻기 위해서 잃어야 할것들과 노력해야 할 것들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셈이다. 그에 비해 미실의 환상론은 그저 꿈과 같은 것이다. 노력이라는 것은 필요가 없다. 단지 상상속에서 살면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둘사이의 교차점은 존재하기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면서 환상과 희망에 의해 살아간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선문답을 들려주는 듯한 미실과 덕만의 대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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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날아올라 2009.09.02 15:59

    선덕의 희망론은 근본적인 맹점을 안고 있다.
    그 희망의 주체는 바로 민중인데 정작 민중이 아닌 선덕이 희망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핀트가 어긋난다.
    민주주의란 시민 스스로 자신이 주인임을 자각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것과 맥락이 닿는다.
    시민들은 주인 의식이 없는데 다른 누군가가 와서 백날 "민주주의"를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부시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는다며 군대를 보냈지만 정작 이라크인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타국의 군대가 갑자기 나타나 독재자를 죽였다고 해서 결코 민주주의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독재에 신음하는 나라에 민주주의를 심고 싶다면 군대를 보낼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민들, 시민들에게 스스로 주인임을 자각하도록 교육하고 지원해야 한다.
    선덕은 스스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자신의 손을 잡은 미실에게 '무엄하다'고 꾸짖는 처지에 과연 그리 할 수 있는가?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은 말이다.
    답글

    • 뷰티살롱 2009.09.02 18:01 신고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시네요. 그런데 댓글을 좀더 부드럽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댓글원칙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삭제하지는 않을께요. 좋은 의견이시니까요. 다음에는 경어체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