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삼국시대였던 고구려와 신라, 백제를 이야기 할 때, 각각의 나라들은 특색을 띠고 있다. 북방의 맹주인 고구려는 후세들에게는 호방함과 진취적인 기상을 떠올리게 하는 나라였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는 데에 인상이 강한 나라다.

 

백제라는 나라는 어떨까?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백제는 그리 많이 회자되지 않지만, 그래도 백제는 국제적인 정세를 펼쳤던 나라로 기억되고, 또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웠던 나라로 인식되고 있을 듯하다. 백제가 멸망하고 왜로 왕족들이 흘러가 일본의 근간을 이뤘다는 얘기들은 많이 들을 수 있고, 최대의 교역국으로도 삼국에서 가장 융성했던 문화를 자랑한 나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백제는 한성을 버리고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성왕 16년까지 백제의 도읍이 되었고, 웅진성이라 불리는 지금의 공산성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공주의 공산성은 견고함이 엿보이는 석성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빼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몇차례의 보수가 있었겠지만, 공주 공산성을 보게 되면 백제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공주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로지 북쪽으로 금강이 트여있는 지형을 지니고 있다. 그 옛날 고구려의 장수왕의 남하로 도읍을 버리고 공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서 웅진성인 공산성은 금강을 바라보고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는 형태다.

 

공산성은 석성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잇는 견고한 모습을 보인다. 과거 삼국시대의 성들은 토성의 형태였지만 공산성은 견고하게 보이며 공주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 공산성이 석성으로 이뤄지게 된 것은 조선초기 충주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리게 되고 1602년에 충청감영이 이곳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미 전쟁으로 초토화 된 충주를 한번 겪은 조선은 이곳의 성을 견고하게 쌓기 위해 석성을 선택했고, 그 덕분에 공산성은 아직까지도 굳건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의 두번째 도읍에 해당한다. 때문에 많은 유물들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복숭아씨, 조개껍데기, 불에 탄 곡식 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돼 당시 삶을 짐작케 하기도 한다.

 

특히 이곳 공산성에서 갑옷 조각도 발견되었는데 가죽은 모두 부식되었지만, 옻칠이 두껍게 된 조각이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예로부터 우리나라 옻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옻칠을 하고 빨간 글씨로 '정관 19년'이라고 썼는데, 그 위에 또 옻칠을 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엇그제 바른 것처럼 투명한 모습이라 한다.

 

또 이곳 공산성에서 말안장과 깃대꽂이 등 전시에 쓰였던 유물들이 전쟁 당시의 모습들을 그려지게 만든다. 발견된 저장 시설에서 가지런히 놓인 갑옷의 못브은 어떤 의례를 치르려는 모습과도 같았따고 한다. 이 외에도 희귀하고 다양한 유물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전시 상황의 구체적인 과정도 가름하게 만든다.

 

 

 

공산성으로 올라가는 성문턱에는 수많은 치적비들이 눈에 띤다. 방문자들은 성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한참이나 멈춰서 치적비들을 들여다보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제민천교 영세비'가 눈에 들어오는데,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된 비석이기도 하다. 1817년 순조17년에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1817년 여름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지자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쌓은 일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사업자금의 조달방법과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백성 이름도 적혀있다.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었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의 공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에 달한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석성으로 다시 쌓은 성이다. 이곳 공산성은 유래가 있다. 성의 이름이 처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지만 고려시대에는 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백제 멸망 직후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고,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해 금서루와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다.

 

공산성 내부로 들어서면 방문객들이 놀이를 할 수 있는 활터도 조성돼 있어서 쉬어갈 수 있는 장소도 눈에 띄는데, 이곳 성터 안에는 마을도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에는 한창 출토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도 눈에 띄기도 했다.

 

공산성과 떼어놓은 수 없는 조선시대의 왕이 있다. 바로 인조다. 반정을 통해서 왕위에 오른 인조에 대한 이야기는 드라마 '화정'이라는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난을 수습한 광해군의 뒤를 이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훗날 이괄의 난을 만나게 된다.

 

인조가 1624년에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이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과 인조가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있다. 1708년 숙종 34년에 세워졌는데, 인조때 영의정을 지녓던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 이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왠지 쌍수정을 보게 되면 과거의 화려함을 생각하기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조선시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한양에서 멀리 공주까지 피신해 있을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는가 말이다. 왕궁터 뒷편으로 자리한 쌍수정사적비와 쌍수정은 인조임금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몸을 피한 인조는 매일매일을 북쪽 하늘만 한없이 바라봤다고 한다. 나무에 기대에 좋은 소식만을 고대하던 인조에게 난을 일으킨 이괄의 목이 전해지고, 반란도 진압됐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로 인해서 인조임금은 자신이 기대었던 나무에 벼슬을 내렸다고 하는데, 정3품이었다고 한다. 충청도 관찰사가 정2품이었으니 충청도에서 두번째로 높은 벼슬을 지닌 것이 나무인 셈이다.

 

애석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아닐까. 백성들이 정3품의 나무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지나갔을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헌데, 그 후에 나무가 죽게 되자 관찰사는 이곳에 인조임금을 그리면서 정자를 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쌍수정에서는 왕궁터가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추정왕궁터'라 부른다. 조용히 아래를 걸으며 시원하고 산뜻한 공기를 마시면서 산책길에 나서본다. 이곳에서는 충청도에서 가장 오래된 벚꽃나무를 만날 수 있다.

 

백제를 배경으로 한 사극드라마에서 흔히 벗꽃이 흩날리는 장면들을 시청할 수 있는데, 이곳 공산성에는 벚꽃이 유명하다. 이곳 공산성은 봄이면 벗꽃이 만개돼 더욱 볼거리를 풍성하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헌병대의 훈련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하면서 심어진 벚나무들이라고 하니 뼈아픈 과거의 유물이기도 하다.

 

공주 공산성에는 특이한 형태이 우물을 만나볼 수 있다. 빗물을 담은 웅덩이라고 추정하고는 있지만, 돌을 쌓아 만든 모습이 큰 연못을 연상시키는 웅덩이다. 웅덩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정이 나오고 있는데, 백성들이 생활용수를 저장한 물 저장시설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옛 왕궁터였다는 점에서 방화수를 담아놓은 웅덩이였을 거라 여기기도 한다.

 

또 하나의 추정은 백제 성왕이 왕궁에 기이한 동물을 키웠다는 기록을 착안해 공산성 안에 연못을 만들고, 동물을 키웠던 곳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기도 해서 '연지'라고 부르기도 하다. 백제시대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과연 이곳 웅덩이가 어떤 용도로 쓰였을지 알지 않을까 싶다.

 

 

공산성 내부를 따라 추정왕궁터와 연지를 둘러보고 다시 서쪽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향해 보았다. 서쪽 성벽을 따라 걷게 되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공주시내다.

 

과거 삼국시대 공주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그리고 고구려의 남하를 피해서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백제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산성을 쌓아 방어진을 형성하게 된 모습들을 떠올려본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공북루에 올라 백제의 왕은 고구려의 남하를 염려하기도 했을 것이고, 조선시대 인조는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창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엿보이는데,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어진을 펼친 모습이니 공산성의 형태는 공격의 주둔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최상의 방어진을 만든 천혜의 산성이었을 것이라 여겨지기도 하다.

 

성루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철교에도 이야기가 숨어있다. 공주가 발전하면서 금강을 건너는 사람들과 물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그동안 사용하던 나룻배로는 도저히 이들을 다 실어나룰 수 없어 나무로 된 다리를 놓게 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홍수에 떠내려가게 된다.

 

그래서 만들어놓은 것이 배다리다. 흔히 말해 군대에서 많이 사용하는 도하작전시에 배를 연이어 연결하고 그 위헤 널적한 판을 이어 만들어놓은 형태가 배다리다. 나룻배 20~20척을 잇고 그 위에 널판지를 깔아 폭이 3m에 길이 150m의 배다리가 완성됐다. 하지만 자연의 힘은 거세다. 배다리마저도 오랜세월과 홍수에 이기기는 역부족이었고, 1932년에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대가로 금강에 다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금강철교다.

 

이 때부터 금강철교는 공주의 관문으로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고 한다.

 

 

공산성을 나오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공주의 옛 지명은 웅진, 일종에 곰이 많은 곳이라 해서 웅진이라고 불리웠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곰의 형태를 띤 곳이어서 웅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공주시내를 내려다보면 마치 시내를 수호하는 석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공주 공산성의 모습은 어쩌면 처음으로 석성을 찾은 여행객들에게는 웅장함을 발산하기도 하겠고, 한편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최상의 방어진을 연상케 만드는 상념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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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뷰티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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