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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라

설국열차(2013) 시사회, 봉준호 감독의 멈추지 않는 생존열차!

by 뷰티살롱 201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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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성수기의 최대 기대작인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관객들과 만난다. 포탈과 영화 커뮤니티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던 영화인 '설국열차'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어찌보면 호불호가 갈릴법하다는 느낌이 강하기만 했다. 지난 용산CGV 시사회를 통해서 개봉전에 미리 관람할 수 있게 된 설국열차는 필자역시 여름 성수기를 겨냥해 개봉되는 영화들 중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영화중 하나였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관객들은 몇가지 질문이 이어지게 될 것이라 여겨지기만 한다. 과연 그 물음은 무엇일까?

가까운 미래에 지구는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의 힘에 의해서 처참하리만치 혹독한 빙하기를 맞게 된다. 인간을 편리하게 하던 과학이 인간을 공격한 셈이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의 힘은 세상을 모두 얼어버리게 만들었는데,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도 빙하기는 가라앉지 않고 세상을 모두 얼려버린 상태가 되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어디론가 달려만 가는 설국열차에 탑승해 있는 몇 안되는 인류가 전부였고, 그 좁은 공간에서조차 인간은 생존을 넘어선 차별에 맞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부터가 설국열차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영화 초반부에 불친절하게만 그려지는 설국열차안의 삶은 온갖 차별이 난무하는 세계다. 가장 후미에서 살고있는 꼬리칸 시민들은 단백질 덩어리를 배신받으며 처참하게 살아간다. 더군다나 그들은 앞칸 권력를 가진 부류들로부터 온갖 핏박을 받고 생활하는데, 부모와 자식간의 이별까지도 마치 형벌처럼 아무렇지 않게 빼앗긴다. 더군다나 빙하의 바깥날씨를 실험하기 위해서 꼬리칸 시민들은 힘을 가진 사람들의 실험대상이 되기도 하는 처참함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설국열차는 꼬리칸에 최하층민들이 살게 된 것이었을까? 첫번째 의문이 생겨난다. 그리고 두번째 의문은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마지막 세번째 의문은 기차는 무엇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처참하게 생활하고 있는 꼬리칸 사람들은 철저하게 통제받으며 자유조차도 잃어버린 듯하기만 하다. 단지 그들에게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생명의 연장이 전부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꼬리칸 시민들의 반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처해있는 비루한 삶에 비해 앞칸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고 불합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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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칸의 지도자격인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는 꼬리칸을 벗어나기 위해서 반란을 계획한다. 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는 너무도 잘 설명된다. 부당하게 아이를 빼앗긴 엄마와 아이의 생존을 알고자 하는 이유에서 반란의 의미는 충분하다. 매일처럼 죄수들의 점호처럼 여겨지는 인원체크에 행동을 제약시켜 놓은 처사는 꼬리칸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들의 반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다름아닌 열차의 설계자인 남궁민수(송강호)와의 만남이 필요했다. 꼬리칸 하나를 벗어나기는 쉽겠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또다른 칸의 출입물을 열어야 하는데,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열차의 설계자인 남궁민수 였다. 하지만 냄(그들의 발음상 냄궁민이라고 합니다~~)은 마약과도 같은 크로놀에 중독되어 죄수칸에 갇혀있었는데, 꼬리칸의 반란으로 죄수칸에 탑승해 있던 남궁민수를 만나게 된다.


'왜'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화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이기도 하다.

영화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처음에 던져졌던 왜 설국열차는 운행하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라는 질문들에 대한 답들이 드러난다. 열차를 좋아했던 윌포드(에드 해리스)는 멈추지 않는 열차의 엔진을 개발했고, 세계를 왕복하는 철도노선을 만들어 철도왕이 되었던 것. 그리고 설국열차는 빙하기를 맞으면서 세계를 몇바퀴나 돌아 늘 같은 궤도를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는 인간의 본성과 생존이라는 가치에 대한 절태성을 부여한다. 밖으로 나가게 되면 채 30분도 생존하지 못하고 얼어죽게 되는 극한의 추위속에서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곳이 열차안이다. 그럼에도 작은 열차속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아온 꼬리칸 빈민층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묻고자 하는 질문이 한가지 떠오르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 탑승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영화 본편을 보기전에 설국열차의 짧은 애니메이션을 먼저 감상하는 것도 이해력이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설국열차가 가는 곳은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재난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처가 설국열차에서는 없는 셈이다. 단지 달리는 열차안이 유일하게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안식처인 셈이다. 하지만 열차의 설계자인 민수(송강호)는 다르다. 그가 열고자 하는 것은 앞칸으로 갈 수 있는 출입문을 아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고 싶다는 욕망이 높다.

왜였을까?


서로가 목적은 같았다. 앞칸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커티스와 그를 돕게 되는 남궁민수, 그리고 커티스에게 전해지는 은밀스러운 메모쪽지의 발신인이 누구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궁금증들은 너무도 쉽게 풀린다. 빈곤층 사람들이 타고있는 꼬리칸에 차별과 살육이 난무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이었는지가 너무도 쉽게 밝혀지고, 그 진실을 보는 관객들은 고개를 도리질치겠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반대표를 던지게 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진실이 발혀지게 되는 셈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하나를 얻게 되면 또다른 목표를 갖게되는 것이 인간이다. 빵을 얻어 배고픔을 해결하게 된다면 따뜻한 잠자리가 그리워지고, 따뜻한 잠자리가 해결되면 깨끗하고 번듯한 옷가지를 입고싶어한다. 그것이 해결되면 남들보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설국열차의 꼬리칸에서 시작된 커티스의 행보는 앞칸으로 갈수록 점차 화려해지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종국의 끝인 앞칸에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부류의 인간은 누구였을까?


영화 '설국열차'의 가장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어 보였다. 안락함과 편안함을 넘어선 인간의 욕망은 결국 타락으로 빠져들어 가장 앞쪽칸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중독자들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었을까? 사람처럼 사는 것이었을까?

커티스는 열차의 엔진을 관리하는 가장 앞쪽칸의 윌포트를 만나게 되는데, 커티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계의 균형이었다.많은 살륙이 벌어졌고, 반란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차안에서 죽었다. 17년동안 말이다. 왜 그들은 그렇게 죽었을까?

헐리우드의 배우들로 채워져 있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빙하기를 맞게 된 인간의 재난을 그린 영화다. 대체적으로 재난영화에는 가족애와 영웅주의가 스며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는 가족애도 영웅주의도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천만관객을 돌파했던 '괴물'에서처럼 '설국열차'의 사람들은 옆집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들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은 어떤 질문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 여겨지기만 한다. 과연 엔진을 책임지던 윌포드의 잔혹함이 비정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인간다운 삶을 바랬던 커티스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었을까? 그들의 행동은 어쩌면 열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냄민수의 행동으로 귀결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영화 '설국열차'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따로 있다. 앞칸으로 가려하는 꼬리칸의 지도자인 커티스도 아니고 열차의 엔진을 컨트롤하는 비이상적인 윌포드도 아니며, 열차문을 열고자 하는 남궁민수도 아닌 남궁민수의 딸인 요나(고아성)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빙하기가 찾아오고 열차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이다. 커티스와 윌포드, 남궁민수는 빙하기 이전의 화려했던 인간문명과 17년동안의 열차생활을 겪었던 기성세대들이다. 하지만 요나는 열차에서 태어난 빙하기 세대라는 점이다.

열차에서 일어난 반란은 왜 한세대를 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에 대한 답은 결말에서 반전으로 관객을 맞는다. 결국 의로운 영웅도 존재하지 않는 영화가 봉준호의 설국열차였다. 마치 괴물의 엔딩이 떠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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