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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드라마리뷰

계백 마지막회, 용두사미 황산벌 전투에 돋보였던 김유신의 의지

by 뷰티살롱 201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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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대작이라는 MBC월화드라마 <계백>이 36회로 종영을 했습니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백제의 3충신인 계백의 장엄한 죽음을 기대했었다면 어쩌면 그 끝이 허무하기만 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은 모습이기도 했었습니다. 백제의 3충신으로 불리는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 그중에서 계백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황산벌전투를 제외한다면 백제사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할 겁니다. 그렇기에 5천의 결사대만으로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대군을 막아내며 당나라와의 합류를 지연시켰던 용장으로 알려지기도 했겠죠. 신라의 5만대군이 아무리 오합지졸인 식량보급부대였다고는 하더라도 10배가 많은 군세적인 우위에 서있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겠죠. 현재전과 달리 과거의 군사적 충돌은 검과 활에 의한 싸움이었습니다. 전략 전술을 짜내는 것이 현대전과 같이 어떻게 전투기를 운용하고 탱크전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해내고 공병전을 통해 끊어진 다리를 보수해 보병의 행군로를 확보해내는 일련의 신무기 싸움이 아니라 과거에는 단지 병사들의 머리수로 싸움을 하는게 다반사였겠죠. 고구려를 넘보던 당나라나 수나라 등이 수만, 수백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것을 보게 되더라도 무기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 병사들의 수적인 우세가 기본적으로 전쟁의 향방을 가름하는 척도였다 할 수 있겠죠. 물론 적은 숫자로도 수십만 수백만의 적들을 물리쳤던 데에는 지리적 전략을 수립했었기 때문이었죠.

드라마 <계백>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역사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계백의 황산벌 전투가 어떻게 그려질지 하는 것이었을 거라 보여집니다. 지루하게만 끌려가던 의자-은고-계백의 러브라인은 사실상 드라마 <계백>를 보기 위해 채널을 고정시켰던 시청자들의 리모콘을 돌려세우게 만든 요인이었을 거라 보여집니다. 장수로 기록된 인물을 마치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멋스럽고 로맨틱한 쿨가이로 만들어버렸으니 초반에 상상했었던 계백장군의 모습과는 너무도 어긋나버린 모습이라 할 수 있겠죠. 1회에 보여졌던 황산벌의 장엄한 전투 '죽지마라' '오늘 하루만큼은 왕을 위해 싸우지도 말고 나를 위해 싸우지마라, 너희들이 사랑하는 부모, 자식, 형제를 위해서 싸워라,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아라' 라는 명대사 하나만으로도 시청자들은 계백장군의 기상과 황산벌 전투, 아니 계백장군의 위용을 상상하게끔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역배우를 지나 달솔, 장군에 이르기까지 계백장군은 장수로써의 기개보다는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남성만을 보여주었을 뿐이었죠. 사극드라마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그 위에 색을 입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종에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이기에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신라가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초석을 다졌었던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이라는 여인이 있었죠. 신라왕실을 허수아비처럼 주무르던 미실의 매력에 시청자들이 빠졌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고현정의 깊이있는 연기가 뒷받침되었기는 했었지만, 무엇보다 미실에 의한 절대적인 권력행사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창작되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덕만공주가 티클라마칸 사막에서 살아돌아왔다는 억지설정을 잠재울 수 있었던 까닭도 따지고보면 덕만의 출생에 대한 비밀보다 미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신라시대의 권력구조와 마지막까지도 그러한 권력을 쥐기 위해 몸부림쳤던 미실이란 여인의 장엄함이 함께 보여졌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미실은 결국 자신이 권력을 쥐기 위해서 무리수였던 국경지역의 병사들을 서라벌로 불러들이는 것을 중단시켰었죠. 국경이 무너지게 되면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에 의해서 패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실이 있고 신라라는 시대적 배경이 함께 존재했기에 창작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가능했던 것이었죠.

드라마 <계백>은 사실 인기드라마인 <선덕여왕>과 동일시되는 부분이 많은 인물일 거라 여겨집니다. 백제의 3충신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계백장군의 출생과 백제에서의 성장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미스테리에 가까운 실존인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5천의 결사대로 5만의 신라군의 행군을 저지시켰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장수였던 것만은 사실일 겁니다. 그런데 단 1회에 보여졌던 장엄했던 황산벌전투와 사택비(오연수)와 무진(차인표)의 등장까지만 하더라도 꽤나 선전할 수 있는 모습이 역력했었던 드라마였었지만, 드라마 계백은 장수 계백이 아닌 한 여인의 남자 계백의 모습만이 보여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은고(송지효)와의 관계가 너무 크게 자리한 것이었죠.

 
드라마 <계백>에서는 사료에 드러나있듯이 의자(조재현)의 사치스러움도 없었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것이 망국으로 간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죠. 은고는 백제를 배신했지만 마지막에는 참회하며 의자에게 죽음을 간청했습니다. 사실 백제의 패망시기를 들여다보면 망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만치 어지럽기만 했던 시대상을 띠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왕의 사치와 귀족세력의 횡포, 거기에 안으로는 왕자들에 의한 사분오열된 나라였으니 패망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겠죠. 결국 백제는 나당연합국에 의해서 망했다기보다는 안으로의 분열에 의해서 망국의 길을 갔던 나라였다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백제의 마지막을 그렸던 드라마 <계백>이 장엄한 계백장군의 죽음이라는 결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두사미격으로 막을 내린 까닭도 어찌보면 시대의 불안요소를 그리다보니 그러했을 수도 있겠다 싶기만 합니다.

낙화암의 3천궁녀는 훗날 사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자왕의 사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3천궁녀라는 숫자에 목메고 답습하는 까닭도 이상하긴 하죠. 3천궁녀라는 것 자체는 왕궁안에 존재하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 의자왕의 후비가 되거나 혹은 성은을 입은 여자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궁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통털어 궁녀라 칭하지만, 역사가들에 의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3천궁녀는 백제의 사치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고, 그러한 3천궁녀를 마치 의자왕이 품었던 궁안의 여인네들로 덧붙인 꼴이 되었죠. 기존의 알려져 있는 상식적인 모습과는 상반된 백제의 마지막을 보여주려다보니 사실상 <계백>이라는 드라마는 이도저도 아닌 혼란스런 드라마로 종영을 한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드라마 <계백>은 처절하거나 장엄함보다는 어지럽기만 한 모습이더군요. 혹시나 마지막회에서만큼은 황산벌전투라는 스펙터클한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1회에 보여졌던 모습이 전부라 할 수 있더군요.

 
역사시간에 배웠던 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과 당나라가 이끄는 나당연합군에 맞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었던 황산벌의 영웅 계백장군. 그리고 그 속에 전해져오는 전장에 임했던 가족들의 죽음은 가장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계백의 부인이 된 초영(효민)은 자청하며 죽여달라 하더군요. 두 아이의 어미가 된 초영이 스스로 목숨을 청함으로써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는 계백장군의 무운을 빈다는 설정에 과연 어느정도의 공감대가 생기게 될까 싶었던 장면이었습니다. 차라리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 여배우 김선아의 욕지거리가 더 개연성있었던 모습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었죠. 왜냐하면 아이를 가진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살아가는 의미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죠. 하물며 두 아이를 한꺼번에 죽게 만들면서까지 백제군의 사기를 높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역사에 기록된 계백장군이 자신의 처자식을 죽였다는 대목은 사실 전장에 임하는 장수로써의 각오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사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오로지 황산벌이라는 전투에 등장한 인물인데 가족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는 것은 정복자들이 정복한 백제라는 나라의 백성들을 아우러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죠.

부인을 죽이고 황산벌에 나선 계백은 신라의 5만대군을 맞서 4번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과연 마지막회 단 1회에 황산벌전투의 대단원의 막을 보여줄까 싶었던 우려가 들기도 했었습니다. 짧은 기록으로 남겨진 황산벌 전투지만, 4번의 싸움이나 혹은 화랑 관창의 등장, 그에 앞서 반굴이라는 화랑까지 등장하는 정도로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족히 3~4회는 할애될만큼 장대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려가 현실이 된 듯한 황산벌 전투의 장엄함이더군요. 일요일 낮에 방송되는 프로그램 중에 개봉영화들을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100여분이나 되는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서 하이라이트만을 모아서 시청자들에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죠. 마치 드라마 <계백>의 마지막회는 영화소개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한 모습이더군요. 단지 싸움만이 있을 뿐 전술과 전략은 없었기 때문이었죠. '협곡을 끼고 방어한다면 늘히 5만 아니 10만의 대군이라 할지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은 영화 <300>을 통해서도 쉬이 알 수 있는 것일 겁니다. 즉 적의 진군로를 좁은 지형, 단 몇사람만이 지날 수 있는 협곡을 끼고 방어한다면 수십만의 대군이라 할지라도 쉽게 진군하지 못하는 것이죠.

마지막회에서 화랑관창의 등장과 붙잡힌 관창을 다시 살려보낸 계백의 모습은 사료가 전하는 바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관창이 다시 전장으로 나오게 되는 과정은 찾아볼 수 없었죠. 마치 역사다큐멘터터리에서 볼 수 있는 나레이션만이 없었을 뿐 대표적인 싸움과 등장이 전부였었습니다.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성충(전노민), 흥수(김유석) 그리고 계백과 함께 꿈꾸었던 나라 백제를 만들어가자며 전장으로 떠나는 계백에게 말을 건네는 의자는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왕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굳건한 백제를 만들고자 했었던 패망군주의 열망이 엿보였던 모습이었죠. 그렇지만 의자왕의 그같은 변화는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캐릭터였던지라 자신들이 꿈꾸었던 백성을 위한 나라에 대한 열망은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3천궁녀가 후대에 의자왕이 품었던 궁중 여인네들로 둔갑되어 버린 것처럼 의자왕이 계백에게 진심으로 말하는 것조차 자꾸만 '승전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어쩌면 의자는 5만대군을 물리친 5천결사대의 주인공인 계백을 더욱 더 의심하고 시기할 것이야' 라는 생각이 깊기만 하더군요.

한가지 마지막회를 장식했었던 주인공은 정작 계백이 아닌 다름 캐릭터에서 나왔다고 보여지더군요. 다름아닌 계백과의 황산벌에서 대치했었던 신라의 김유신(박성웅)이었습니다. 마치 한편의 영화 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했던 4번의 싸움과 화랑 관창의 등장보다 존재감이 높았던 모습은 김유신의 의미있는 한마디였다고 할 수 있더군요.


좁은 협곡을 끼고 방어선을 구축한 계백에 의해 4번의 패배를 맞본 김유신은 후에 신라의 30대왕이 되는 문무왕 김법민으로부터 진군이 막혀있음을 질타받게 됩니다. 사비성으로 향하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는데, 진군이 지연되었기 때문이었죠. 김법민과 김유신의 대사속에 당시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관계에 대해서 엿볼 수 있겠더군요.

백제의 사비성을 먼저 입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한반도의 지배권에 대한 문제를 좌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즉 당나라가 먼저 사비를 함락시키게 된다면 그만큼 백제 영토에서의 기득권은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무엇보다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대군은 정예병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계백이 백제의 장군들과의 전략회의에서, 김법민과 김유신의 대화속에 숨겨져 있는 사실은 5만대군은 보급부대로써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나라 수군 13만과 함께 움직였던 신라의 정예병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었죠.
 
드라마 <계백> 마지막회에서 김유신은 계백의 5천결사대에 막혀 패전을 4번이나 하면서 진군을 하지 못하자, 김법민은 김유신에게 '당군의 소정방이 보급부대가 늦다는 것을 채근하고 있다며 신라왕을 겁박하고 있다, 신라까지도 당의 영토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그러하고 해! 어차피 소정방과 싸운다 해도 계백보다는 어렵지 않을테니까'라며 호통을 치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략으로 대응하는 것이죠.


계백이 신라의 오합지졸 5만대군을 맞아 싸웠다 하더라도 사실상 숫적인 우세는 신라군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당의 13만대군을 오합지졸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계백이 그러했듯이 김유신 또한 당나라에 대한 기개가 엿보였던 모습이었습니다.

황산벌의 계백장군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부풀려져 있는 부분이 적잖이 많을 것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위대한 영웅임에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김유신과 싸웠던 황산벌이 전부이니 이상할 정도이기만 합니다. 어쩌면 신라가 백제를 품어야 했던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해 절대적인 영웅이 필요했을 거라 여겨지기도 하더군요. 백제가 패망하고 백제의 왕실사람들은 당으로 끌려가 목숨을 연명하게 되고, 귀족들 또한 자신들의 사병과 함께 투항하게 됩니다. 이는 패망이라는 수순과는 달리 너무도 평화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백제의 역사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 신라를 받아들여야 하는 백제 백성들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기개가 넘치는 한사람의 충정이 필요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후대에 의자왕보다 더 칭송받는 백제의 마지막 3충신으로 자리하게 된 사람이 계백이라는 인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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