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울산역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언양읍이다. 다른 지역에서 울산으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 울산역을 거치게 된다면 언양의 먹거리를 맛보고 쉬어가는 것이 어떨까. 언양의 대표적인 지역먹거리인 언양불고기를 언양불고기특구에서 맛보고 피로한 몸을 잠시 쉬어본다.

언양은 크지않은 읍으로 태화강의 상류인 남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각각 나쥐어 상북, 중북, 하북을 천북삼면이라 일컫고, 상남, 중남, 삼동을 천남상면이라 하여 모두 6개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폐읍되어 자립할 능력이 없어 일시 울산도 호부에 병합되었다가 광해군 때에 다시 언양현으로 독립되었는데, 숙종 이후 철종 말기까지 150년간 수차 식년에 발간된 자료에 의하면 언양에 대한 자료가 전해진다고 한다.

울주로의 여행 첫째날 서울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KTX에 몸을 싣고 울산역에 도착한 필자는 언양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언양불고기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도 먹어본 적이 있었던 언양불고기였지만 현재에서 먹는 먹거리만큼 맛있지는 않다.


본격적인 울주여행에 앞서 점심으로 배를 채운 탓에 운식하기가 귀찮은 것은 당연했다. 가까운 곳에서 시간도 보내고 소화도 시킬 겸 언양읍에 위치한 언양읍성을 들러보기로 했다. 지난 2013년에 남문 영화루를 복원했다는 소식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출발에 앞서, 어떤 모습일지 조바심마저 들었다.

오전에 출발할 때부터 좋지 않은 날씨였는데, 간간히 소낙비가 내렸다.
봄비인가?
겨우내 황금색의 옷을 곱게 차려있었던 언양읍성 북쪽은 아직 보수가 진행되는 과정이었던지 어디가 시작인지 분간이 되는 않았지만, 성곽 주위에 파릇하게 새싹이 돋아난 잔디들이 옛 성곽터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북쪽으로 진입하는 언양읍성의 성곽터는 돌무더기가 길게 쌓여져 있어 옛 성곽터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성인키의 허리높이가량이 남아있는 성곽터는 오래되어 바래진 색깔만이 고혹스럽기마저 한 모습이었다. 이곳 언양읍성의 높이는 어느정도였을까 짐작해 본다. 비록 세월이 지나면서 바람에 무너지고 혹은 전란으로 소실되어 이제는 성인의 키 절반가량만이 남아 있는 모습이지만, 과거에는 장신의 키를 지난 성인도 쉽게 오르지 못할 높이가 아니었을까 싶어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언양읍성이 자리한 위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평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필자는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하고 있는 해미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국내에서 평지에 축조된 성들 중에서 성곽과 보존상태가 깔끔하게 이어져온 성 중에 하나가 해미읍성이라 할만하다.


언양읍성의 성곽 안쪽은 돌무더기를 지탱하기 위해서 비스듬하게 흙이 쌓여져 있는데, 언양읍에 대한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아픔이 많은 곳이기도 해 보인다. 남쪽바다에서 올라온 왜구에 의해서 조선의 강산이 유린당했던 조선시대 임진왜란은 부산을 통해 왜구들이 북진했다. 부산에서 울산을 거쳐 한양으로 가게 되는 길목에서 언양읍성을 만났을 것이고, 수많은 병사와 백성들이 이곳 언양읍성을 방패삼아 싸웠을 것을 상상해 본다.

한때 언양은 전란으로 인해 일어설 수 조차 없어서 피폐해졌다는 기록을 보면 이곳 언양읍성이 가진 아픔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대부분의 성곽들이 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반면, 언양읍성은 평지에 축조되어 있는 형태다.

조선시대가 아닌 이미 삼국시대에 축조된 언양읍성은 둘레가 약 1,000m로 네모꼴 형태를 띠고 있다. 사각형 형태의 성곽이 의미하는 바는 어쩌면 성을 중심으로 마을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된 도시정비를 통해서 성곽의 형태마저도 마을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인데,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마을 백성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추고 있다.


언양읍성 내부는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흡사 수백년의 시간이 지나 이제는 유적지가 되었음에도 사람들과 함께 숨쉬는 문화유산의 좋은 방향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드는 모습이기도 했다. 산성이나 혹은 문화재로 등재되어진 문화유적지를 찾아가게 되면 대부분 일반인들의 접근을 불허하게 만들어놓은 게 일반적인 형태라 할만하다.

문화재의 보호와 유지보수를 위해서 값비싼 입장료를 받아내면서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의 유물이 마치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데, 언양읍성의 모습은 그러한 상업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남문의 영화루뿐만 아니라 서문과 북문, 동문을 모두 복원하게 되면 언양읍성 내부를 완전히 폐쇄하며 관광단지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지까지는 자유로이 일반인들이 드나들며 읍성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봄이 찾아온 것인가.
언양읍성 내부의 밭은 어느새 씨를 뿌리기 위해 농부가 일구어놓은 황토빛 흙이 곱게 단장해 놓은 모습이었다. 언양읍성은 조선시대에 들어 연산군 6년에 돌로 개축되어 확장되었는데, 이때의 둘레가 약 900m에높이가 13척으로 성위에 나지막하게 쌓은 첩이 834개소이고 성 안에는 우물이 네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에는 남문과 북문의 주변에 2곳의 우물터가 남아있고 조선후기에는 객관과 동헌을 비롯해 많은 관청이 들어섰다고 한다.


언양읍성을 가게 되면 특이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읍성 내부에 위치하고 있는 초등학교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양초등학교인데, 아마도 언양읍에서는 대표저인 학교인 듯하다. 언양초등학교에 대해 현지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재미있다.

1906년에 영명학교로 세워진 것이 시초인 언양초등학교는 1913년에 언양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꾼바 있다. 그리고 1942년에 언양국민학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초등학교라는 단어는 사실상 역사가 깊지 않다. 필자역시 초동학교 출신이 아닌 국민학교를 졸업한 세대인지라 국민학교와 초동학교의 변화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구세대 중 하나다.

1906년에 세워진 영명학교 창설당시에는 언양읍성에 대한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리라. 뿐만 아니라 언양읍성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못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게 되면서 근대사를 지나오는 과정에서 언양읍성은 어느순간 지역에서 잊혀져 갔던 그저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 보인다.

 
기온이 풀린 봄철이 되어 파랗게 자라난 미나리 밭을 발견할 수가 있는 곳이 언양읍성의 모습이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북문과 남물을 가로지르는 길을 천천히 걷게 되면 좌우로 펼져지는 언양읍성의 내부는 너무도 한가한 모습이기만 하다.
 
다 자란 미나리를 수확하는 동네 아주머니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길가 오른쪽 논에서는 벼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경운기로 흙을 갈아엎는다. 멀리 성곽밖의 언양읍 아파트들이 빠꼭하게 고개를 내밀고 들어서 있는 모습은 구시대와 현대의 조우를 마주하는 풍경처럼 엿보이기도 하다.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수로가 언양읍성 한복판을 가로질러 흘러내리고 그 물은 파란 미나리밭으로 흘러들어간다. 수로 주변으로 언제 피어났는지 이름모를 들꽃들이 수줍은 얼굴을 내비치며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유혹하듯이 피어나 있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국내의 산성을 찾게 되면 문화유적지가 해서 함부로 농사를 짓거나 밭을 일굴수 없게 만들어놓았는데, 그나마 허락된 이들은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부여해주는 게 일반적이다. 아마도 언양읍성 내부의 농사도 비슷한 유형이겠지만, 이곳처럼 밭농사와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성곽은 오랜만에 보는 듯하다.


북문을 통해 가로지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남문 인근에 조성되어진 마을 주택길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오솔길을 따라가는 듯한 풍광에 잠시 걸음을 늦추게 만드는 읍성내부의 마을도 또 하나의 볼거리이자 둘레길이 아닐까 싶기만 하다.

꽤 많은 가구들이 읍성내부에 터를 잡고 안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지역 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내부의 집들을 마음대로 개보수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언양초등학교의 담장이 내다보이는 언양읍성 내부길이 끝나는 지점에 다나르자 거대한 고목이 눈에 띄였다. 마치 길의 끝을 알리는 이정표인양 자리하고 있는 언양읍성의 문지기가 아닌가 싶어 보이는 나무이기도 해 보였다.


지난 2013년에 복원을 끝낸 언양읍성의 남문 영화루에 도착했다. 웅장하고 장엄하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서야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착찹해진다. 그도 그럴것이 울주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왜구들을 막아내고 북방에서 쳐들어온 호란을 겪으면서 그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언양읍성의 남문인 영화루가 복원되었을 뿐 언양읍성 전체가 복원된 것은 아닌지라 세월이 지나 완전하게 제 모습으로 복원되어진다면 언양읍성은 새로운 언양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높은 산에 오르지 않아도 시내에 인접해 있는 읍성을 보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가 말이다.


남문 영화루의 모습은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성곽이 외부와 100%로 개방되어 있는 다른 성들과는 달리 남문 영화루는 외벽을 쌓음으로써 성문을 방어하는데 효과적으로 설계도어져 있다. 반형 형태의 외벽을 쌓음으로써 적군의 성문공격을 직접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서 들어오는 적군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 외벽쌓기 성곽의 특징이라 할만하다.

과학적으로 지어진 조선시대 개혁군주인 정조가 수원에 축조한 수원성은 이같은 원리를 활용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수원성 서문인 화서문은 반원형의 외벽을 쌓음으로써 직접적인 성문공격을 할 수 없도록 해 놓았다. 언양읍성의 남문 영화루가 실제 이같은 형태로 지어진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과학적인 방어체제를 갖춘 설계라 할만하다.


특히 특이한 점은 영화루가 지니고 있는 성문의 형태였다. 다른 석조성곽의 성문들과는 달리 언양읍성의 영화루는 성문을 하나의 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성문 누각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성문의 형태는 국내에 있는 성들과는 다른 형태의 모습이라 여겨진다.

돌을 쌓아 성문의 테두리를 유지한 것이 대부분의 성문의 형태인데 반해 언양읍성의 성문은 사람이 들고나는 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으로 이같은 설계는 단점이 있어 보인다. 성문이 적들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어서 쉽게 깨뜨려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도 언양읍성의 영화루는 방어개념의 성문이라기보다는 출정을 위한 성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우리는 숭례문이 불에 타 소실됨으로써 재복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복원과 보존은 엄밀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 여겨진다. 옛것이 지닌 그대로의 예술과 멋은 복원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부분이다.


언양읍과 인접되어 있는 언양읍성 영화루의 복원은 울주를 관광하는 여행객들에게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가능케하는 것이기도 한 동시에 울주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여유로운 시간을 제공해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성루에 올라 복원을 기다리는 성곽의 외곽을 바라보면서 완전히 언양읍성이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사각형 형태의 평지에 축조된 성은 산성보다 방어에 어려움이 많이 들기도 할 터이다. 산을 오르면서 적군이 지치는 것도 산성에서 지키는 병사들이 유리한 이유중 하나이겠지만, 개활지에서 사방 어느곳으로 공격을 해 올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평지 성곽이 지닌 단점이라 할만하다. 그만큼 평지에 세워진 성을 지키는 장수는 지략적으로 꽤 높은 식견을 지니고 있어서 하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했다.


영화루의 모습들을 담아내는 카메라 셔터에 자꾸만 손이 가게 되는 것은 왜일까?
여러장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기진 배를 움켜진 듯이 손가락이 자꾸만 카메라 셔터로 향한다.


남문 영화루를 지탱하는 나무기둥에 '서기 2013년 4월 5일'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기도 했다.

언양읍성의 남문 영화루를 뒤로 하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언양과 울주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현지인에서 들을 수 있었다. 본디 같은 지역인 울산과 언양의 백성들은 과거에는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혼담이 오가지 않은게 울산과 언양간의 불협화음이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언양의 양반들은 채 3%를 차지하지 않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언양지역은 86% 가량이나 되는 많은 양반들이 있었고, 울산은 68%가 차지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울산에 병마절도사가 있었기에 조선시대 후기에 성행했던 사고파는 양반문서의 매매에 언양이 많은 양반들이 유입될 수 있었다고 한다.

울산은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울산과학기술대학이다. 조선시대에 울산에는 향교와 서원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대표적인 서원이 보광서원이란 곳이다. 임금에게 직접 현판을 하사받은 사원은 일명 사핵서원이라 칭하며, 울산에도 이같은 사핵서원이 자리하고 있고, 교육의 중요성을 어느지역보다 우선시 하는 지역이라 설명해 주었다.


언양읍성 영화루를 뒤로 한채 언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들을 수 있었다. 언양에서 가장 가까운 KTX 역인 울산역에 대한 비화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여행객들이 듣게 된다면 아마도 묵은 피로를 날릴만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울산시내에서 가까운 기차역은 사실 울산역이라기 보다는 태화강역이 있다. 동해남부선의 연장선인 기차길은 애초에 울산역을 지나 남창역을 지나고 있었다. 헌데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가는 KTX 증설로 울산을 통과하게 되면서 역 설치를 현재의 언양에 만들었다고 한다. 애초에는 역 이름을 언양역이라 할지, 아니면 통도사역으로 할지를 정하는 데에도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언양에서 가까운 곳에는 1500년전에 지어진 통도사가 유명하다. 최종적으로 기존 울산역을 태화강역으로 개명하고 현재의 KTX 역을 울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북문으로 되돌아나가는 길목에서 언제 앉았는지 논에 한가로이 내려앉은 백로 한마리가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혼자 생각해 본다. 언양읍성의 모습이 완전히 복원된다 하더라도 한가한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읍성내부에 자리하고 있던 언양초등학교가 언양읍성 복원사업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익히 알고 있었다. 헌데, 필자는 왠지 서운한 생각이 든다. 옛것을 복원하는 사업이라 해서 읍성내부에 학교가 있는 것이 부당했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쩌면 온전히 제 모습을 찾았다 하더라도 언양읍성 내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있는 것이 더 특별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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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뷰티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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