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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국내여행

[충주 여행]중원문화의 중심을 보게되는 충주 미륵대원지

by 뷰티살롱 2014.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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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가정의 달은 무려 연휴가 사흘이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부터 시작되는 황금연휴라면 회사원들은 2일 하루를 월차를 내게 된다면 6일간의 연휴를 보내게 되기도 한다. 헌데 2014년 5월 가정의 달이 시작되는 첫째주에는 그리 기분좋은 기분은 아니다. 지난달 발생한 세월호침몰 사고에 이어 어이없게도 지난 5월 2일에는 서울지하철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무려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된 서울지하철 소식을 듣게 되니 블로그로 글을 쓰는게 요즘들어서 여간 힘들게 느끼진 적은 없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생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도 포스팅을 올리지 못하고 지난 2주간 휘적거리며 글을 발행하는 날짜가 지연되는게 이제는 중독처럼 되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패닉상태에 빠진 것인지 5월의 첫째주말을 맞는 필자의 마음은 심란스러움이 교차되기만 한다.

지난달 여행했었던 충주여행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충북 충주는 온천여행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여행코스이기도 한데, 하늘재를 넘는 가벼운 등산코스가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하늘재를 찾게 된다면 한반도 중원문화를 찾아볼 수 있기에 더할나위없이 배울 것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헌데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라 여겨진다. '중원'이라는 단어때문에 말이다. 흔히 말하는 '중원'은 한반도에서 불리워지는 의미있는 단어라기 보다는 '중국의 중원'을 떠올리는 분들이 적잖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한반도의 중원문화는 존재한다.

충북 충주는 어떤 지역일까?

한국사의 한 시대였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중원문화라는 것이 왜 생겨났는지를 알수 있다. 충북 충주라는 지명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었지만 신라로 복속됨으로써 경덕왕 때에 중원이라 불리게 되었고, 다른 명칭으로는 대원이라고 불리워졌다. 982년에 충주로 개칭하고 그후 1281년에 다시 충주성이라 개칭되었다.

미륵리사지를 시작으로 등반로가 형성되어져 있는 하늘재에는 이러한 한반도 중원문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미륵사를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팁이라 할만하다.


미륵리사지는 다른 지역의 많은 절들과는 달리 아담하고 소탈한 모습이 미륵지사지를 찾는 여행객들의 발길을 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는 곳이다. 웅장한 대웅전의 모습이나 혹은 거대한 석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요란스럽운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불교사원이 아닌 모습이 이채롭다.

충주 미륵리 원터는 볼 수 있는데 미륵대원지(사적 제 317호)는 창건과 더불어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보다 더 근대에 해당하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충주의 지리적인 요충지로써의 역할이 상실되었을 법도 하다.

역사의 시간으로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던 고려와 조선시대와는 달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3국이 대치되어 있던 시대였다. 그중에서 삼국의 국경이 뒤바뀌며 나라가 바뀌었던 곳이 어디였을까? 충주는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북진, 백제의 동진이 뒤엉키면서 만나게 되는 전략적인 요충지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충북 충주가 한반도의 중원문화를 형성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미륵리 원터는 고려초기에까지도 충주의 중원문화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던 곳이라 할 수 있어 보인다.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경로에 위치하고 있어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또한 원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되낟. 하지만 조선시대에 조령이 개통되면서 미륵리는 원의 기능이 상실되어갔다고 추정되고 있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입 구'자가 중첩되어 잇는 형태로 지어졌고, 건물 중앙에 말을 묶어두는 마방이 있어서 주변의 여행자와 관리인의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원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개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경로에 자리했던 것으로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이에 해당한다.


충주 미륵리사지, 흔히 줄여서 '미륵사지'라 불리는 이곳 미륵대원지의 볼거리는 거대 불상이다. 한국에 있는 거대불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석굴암이다. 정교하게 조각된 불상의 조각은 예술적인 미를 뽐내며 많은 외국 관광객들도 찾는 곳이다. 그에 비해 미륵대원지의 거대 불상은 투박한 듯 보여지기도 하고, 기교가 많은 석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아마추어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듯해 보이기도 하다.

고려초기의 석굴사원터로 하늘재와 지릅재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충주미륵대원지는 형재 석축안에 거대한 돌로 만든 석불입상과 석등, 5층석탑이 일직선상에 북향을 한 단탑식 가립배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날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 사찰과는 달리 작아보이는 규모이기는 하지만 원터 자체는 큰 규모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 절터에는 이외에도 건물지의 초석을 비롯해 사각석등, 3층석탑, 돌거북, 당간지주 등 많은 석주물이 전해지고 있다.


석탑과 석불입상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것도 새로운 모습인데, 특히 입상이 북쪽을 향해 서 있다는 점도 다른 사찰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라 할만하다.


미륵리 오층석탑이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오층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들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답신석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쪼은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해 볼때, 옥개석의 너비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 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해 각 층의 체감율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4각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석등은 전형적인 8각석등으로 균형잡힌 우수한 석등으로 손꼽힌다. 하대석은 4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을 조각했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 위에 꽃보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했다.


거대한 거북이 형상의 귀부다.


높이 10m에 달하는 거대석불인 석조여래입상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거불의 하나로 화강암 다섯개를 연결해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고 머리에 팔각형의 판석 하나를 올려놓은 갓으로 삼고 있다. 양감이 없는 매우 위축된 신체에 비해 얼굴은 평면적이기는 하지만 꽤 정성이 담겨있는 조각상이다. 흡사 신체의 조각과 얼굴의 조각상이 다른 느낌을 주는데, 소박스러움이 묻어나는 신체의 조각과는 달리 얼굴형태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초승달 같은 긴 눈썹과 직선적인 눈, 두꺼운 입술 등의 표현은 전체적으로 토속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투박함이 엿보이는 석조여래입상이다.


미륵대원지에 애한 전설이 전해지는데,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에 얽혀있는 이야기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나라가 망한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 덕주사를 창건하고 남향인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했고, 마의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고 전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고려초기의 석굴사원터로 면적은 80.454m2이고 평균 해발 378m이상의 비교적 고지대에 세워졌다. 이 사원은 주실이 북쪽을 향하고 잇는 것이 특이한 배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나라를 잃은 마의태자와 월악산의 덕주사를 향하게 된 전설이 깃들여 있는 듯하다.


충주 미륵대원지 전체를 돌아보는 데에는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석조여래입상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오층석탑과 석등을 돌아보는 데에는 짧은 시간이면 족하다. 거대불상으로 향하는 계단식 원터를 밟아보는 것도 삼국시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감흥에 빠질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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