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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라

이태원살인사건(2009), 관객을 배심원으로 만들어버린 영화

by 뷰티살롱 2009.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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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2년전인 1997년 4월의 어느날 밤, 이태원 햄버거 가계 화장실에서 대학생인 조중필군이 살인자에 의해 난도질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다름아닌 에드워드리와 아더패터슨이라는 10대의 미국인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반미감정이 고조되는 영향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어쩌구니 없게도 진범?, 아니 범인은 찾아내지 못하고 용의자였던 두명의 10대 미국인 학생들은 풀려나게 되었죠.

용의자가 있으나 범인이 존재하지 않은 사건.... ....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은 어찌보면 미스테리극의 대열에 있는 <살인의추억>이나 <그놈목소리>와는 또다른 색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법합니다. <이태원살인사건>은 실화를 바탕으로 리얼리티를 살려내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영화의 요소 중 하나인 스릴이나 재미라는 부분을 배제하고 극도로 리얼리티 법정영화로 몰입되어 있어 한편으로 스릴러의 장르를 기대하고 있었던 관객들은 다소의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기도 하더군요.

그렇지만,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은 충분히 그 사건을 영화화 했다는 점으로 봐줄만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읽기를 접으셔요. 본 글에 있는 사진의 저작권은 제작사인 선필림과 영화사 수박에게 있습니다. 본 글에 있는 사진은 인용을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97년 4월 8일 10시경 여자친구와 이태원을 찾은 조중필을 10대 미국인 학생이 무참하게 칼로 찌르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수구로 빨려들어가는 핏줄기. 그러나 조중필을 직접적으로 살인해 인물이 누구인지는 담아내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리고 한국의 경찰이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출동하지만 이미 화장실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상태죠. 얼마지나지 않아 미국 CID(이것의 정체는 FBI나 CIA를 연상하면 될듯. 연방수사기관 정도로 알면 되니까요)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피어슨(장근석)이 한국 검찰에게 인도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미스테리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다름아닌 수사를 맡게 된 박검사(정진영)에게 피어슨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르지 않았다고 하며 직접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다름아닌 함께 있던 알렉스(신승환)이라고 자백합니다.

목격자 자격으로 경찰에 출두한 알렉스는 피어슨의 자백과 박검사의 수사로 목격자에서 살인용의자로 뒤바껴지며 피어슨은 폭행범 내지는 살인방조나 교사, 무기소지죄가 적용되게 됩니다.
관객은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하기보다 한편으로 영화를 통해 배심원이 된 듯한 묘한 기분에휩싸이게 되더군요. 두명의 진술, 용의자로 지목된 두명, 그중 한명은 분명히 살인자에 해당하고 다른 한사람은 목격자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판결은 무죄판결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으로 영화를 보면서 실화라는 점에서 볼때, 당연스레 그렇게 만들었어야 했었겠지만, 흥분되게 만들더군요. 영화가 잘 만들어졌느냐 아니면 수준 미달이냐를 떠나서 두명의 용의자였던 알렉스와 피어슨에게 판결되었던 내용은어쩌구니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황망한 수준이었으니까요.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영화라는 장르, 즉 스릴러라는 공식에서 볼때, 영화의 완성도는 나쁘지가 않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장근석의 연기가 다소 오버하는 듯한 표정연기가 있긴 했었지만, 무난할만큼 안정된 수준이었으니까요. 거기에 박검사에 의해 사건이 미스테리적으로 돌변하는 듯한 모습은 마치 결말에 예상치않은 반전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조중필 학생이 죽음을 당한 화장실의 세면대에서 발견된 혈흔을 보면서 "그래도 깨끗하게 치우지는 않았네"라는 말이 한편으로 사건에 대해 단점으로 관객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를 연상케 하는 대사로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박검사의 소신있는 반론과 계속적으로 피어슨에게 보내는 의문의 눈빛은 알수없는 듯한 반전을 예약해 놓기도 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일상의 사건기록으로 매진하더군요. 결론적으로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은 일종에 관객의 재미를 찾아주는 영화라기 보다는 관객에게 공감대를 얻기위해 마련한 영화였다고 보여지더군요. 독립영화였던 <워낭소리>가 대사한마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던 것은 일종의 감성을 끌어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이태원살인사건>도 관객에게 일종의 공감대를 일으키게 만들 영화로 보여지더군요.

미제사건이나 다름없이 지나가버린 이태원 햄버거 살인사건에서 두명의 용의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무죄판결로 방면하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실소와 검찰의 무능함에 대해, 혹은 법망을 빠져나가는 범인의 모습에 대해, 그것도 아니라면 소위 미 군무부 자녀라는 신분적인 위치에 있는 특혜권을 지니고 있는 모습에 분노를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증거와 살인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을 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두명의 용의자의 행동을 보면서 말입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이 시대에 있어서 미국인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소시민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을 죽인 사람이 누구예요"라며 오열하는 조중필 모를 보면서 법에 의한 질서가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만들어내고 있죠. 더군다나 유죄, 무기징역이라는 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의 판결은 이를 들어엎어놓으며 무죄선고를 하게 됩니다. 증거부족이라는 이유에서죠.

"우리가 죽었어요. 하지만 난 안 죽였어요"

피어슨과 알렉스는 상대방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목격자에 불과하다는 진술을 일축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보더라도 범인은 둘 중의 하나라는 얘기가 성립이 되겠죠. 그렇지만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에서는 피살자는 있으나 범인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개살인이라고 할만큼 알렉스와 피어슨은 각각의 진술에서도 상대방이 범인인임을 시인하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둘 모두가 무죄석방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이자 배심원으로써의 판결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 듯 하더군요.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태원에서 발생했던 1997년 조중필 피살사건은 마치 대한민국의 법망을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유유하게 용의자들은 한국을 빠져나갔습니다. 두 용의자가 무죄판결로 풀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흥분을 감추지 못할 것이지만, 여기에서 검찰의 무능함을 보면서 또한번 흥분하게 되는 부분이죠. 다름아닌 영화의 엔딩에서 두 용의자와 각각 자신을 변호했던 검사와 변호사를 찾아가게 되는 부분에서입니다.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피어슨일까요? 아니면 알렉스일까요. 스릴러 장르로 개봉되었지만 사실상 영화 <이태원살인사건>은 관객들에게 하나의 물음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검사라면 어떤 판결을 내려야 했을까요 라는 명제죠. 그리고 그 명제속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미국인에 대한 대우와 처우가 어떻게 되고 있나요 라는 숨어있는 물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니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영화에서 보여지는 미국인에 한정될 수 있겠지만, 포괄적으로는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한 법과 평범함과 소시민으로써의 보통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법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단상이 들 영화로 보여지더군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그 말의 의미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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