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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국내여행

[충남 예산]예술가의 여관으로 일컬어지는 덕숭산 '수덕여관'

by 뷰티살롱 2015.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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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이 고향인 터라 예산하면 떠오르는 곳이 '수덕사'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과 서쪽으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곳이 '수덕사'다. 이제는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 시절에 수덕사로 학교 소풍을 갔었던 때가 있었다.

 

아이의 종종걸음으로 꽤한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던 곳이었고, 그 시절에는 단지 명승고절이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야외수업을 떠난듯 들뜬 마음도 갖고 있었던 때였으리라 기억된다.

 

30여년도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 충남 예산에 위치하고 있는 덕숭산을 오랜만에 찾은 듯하다. 무엇을 하면서 살았던 것인지, 고향이면서도 가볼곳이었던 이곳 수덕사를 오랜만에 오게 되었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곳 수덕사 입구에 위치해 있는 '수덕여관'을 찾기 위해서 일부러 발품을 팔고 오게 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겨울로 접어드는 초입에 때아닌 폭설이 덕숭산을 덮었고, 수목은 어느샌가 하얗게 머리가 새어 산신령이라도 나오듯한 운치있는 장관을 연출하는 모습이었다.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했을 때에 눈소식이 다소 있기는 했었지만, 갑작스레 많은 눈을 보니 반갑기만 하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기에 더더욱 반가움이 더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산41에 위치해 있는 '이응로 선생 사적지'이자 충남 기념물 제103호가 이곳 수덕여관이다. 바로 몇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스님들의 도량인 '수덕사'가 위치해있어서 '수덕여관'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으련만, 때마침 '수덕여관'을 찾았을 때에는 눈밭이 만들어낸 광경이 하룻밤을 묵어가고 싶은 충동마저 들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덕여관은 수덕사 내부에 있는 여관이라 할수 있다. 빠꼭히 자리하고 있는 덕숭산 산행로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많은 상점들을 지나게 되면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문을 지나게 된다. 걸어서 10여분도 채 거리지 않는 거리에 수덕사 경내로 들어서게 되면 사대천왕문을 지나기 때문에 수덕여관은 한편으로는 수덕사 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곳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덕숭산을 배경으로 수덕여관은 한폭의 수채화를 머물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응로 화백은 이곳 수덕여관은 1944년에 구입했다. 하지만 향년 84세인 1989년에 프랑스에서 사망한 이응로 화백의 마지막 국적은 프랑스였다. 홍성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예산에서 주로 성장한 이응로 화백은 1923년에 당시 경성부에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화생이 돼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수덕여관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정겨운 조각상들이 내린 눈에 쌓여 신비로운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아주는 듯하다. 어느샌가 쌓였을지 덕숭산 내에 많은 양의 눈이 쌓여 있었다.

 

특히 수덕여관과 맞닿아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 수덕사미술관은 또 다른 여행의 볼거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수덕사에서 내려오는 조그마한 내천은 물이 말라있지만, 눈이 쌓여서 정감을 더하는 모습이다.

 

이응로 화백은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추상하해 표현했다.

 

특히 이곳 수덕여관은 수원출신의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나혜석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물렀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덕사의 경내가 아닌 이곳 수덕여관이라는 것이다.

 

수덕여관은 ㄷ자령의 초가집이다. 정면으로 보면 중앙에 출입문을 두고 한편으로 정자와 같은 높임마루를 두고 있다. 마루 밑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한 듯하다. 원형을 복원했다는 수덕여관은 정면 5칸에 측면은 6.5칸, 또 한편은 4칸으로 꾸며졌다.

 

집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측의 날개채는 모두 6개의 방을 두고 있다. 아마 이곳에서 손님들이 묵었을 것이다. 객방의 방문 앞에는 툇마루로 연결했으며, 중앙에도 방이 있다. 정자마루를 올라갈 수 있는 이방은 사랑채 대용으로 사용이 된 듯하다. 좌측 날개채는 안채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수덕여관에 대해서는 이응로 화백의 이야기와 더불어 또 한사람의 예술인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나혜석이다. 이응로 화백의 여제자로 알려져 있는 나혜석에 대해서는 수많은 수색어가 붙는 인물이다. 자유연애와 불운의 사랑을 했던 탓에 흡사 예술가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이는 바로 나혜석이다.

 

남자와 여자의 권리가 동등하며, 남자들은 예사로 첩을 들이면서 여자들에겐 외간 남자를 사귀지 말라 강요하는 거은 불평등하다는 나혜석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이런 비판들은 많은 파문과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고, 나혜석을 고립시켰다.

 

나혜석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녀는 동시대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 최린과의 불륜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실험적인 삶은 분명 과격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부속물로 일평생 사는 것이 당연했던 조선 사회에서 남자와 동등한 위치로 여성을 끌어올리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여성을 바라본 그녀의 시도들은 현대에 들어 가치를 얻고 있기도 하다.

 

 

 

수덕여관과 인연이 깊은 세번째의 인물은 바로 김일엽이라는 예술가다. 본명은 김원주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김일엽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아들못지 않는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기대속에서 김일엽의 환경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두터운 가족애를 갖고 있는 집안이었지만, 그녀가 다섯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출산도중 사망했고, 남동생도 태어난지 3일만에 요절하면서 가족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꽃다운 18세에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됐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의 원조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일엽은 그곳에서 허영숙, 이광수, 나혜석을 만났고, 자연스럽게 나혜석과 친구가 됐다. 여자 유학생들의 잡지인 '여자계'를 창간한 나혜석과 교류하면서 자신도 귀국 후에 조선에서 여성 잡지를 발행하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다.

 

김일엽의 일생은 한편의 신파 멜로를 연상케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연속이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과의 결혼은 결국 자유연애를 선언하며 이혼을 선포했었고, 일본에서 오타세이조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하지만 오타세이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의 장수였으며, 일엽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다.

 

일엽은 춘원 이광수가 도쿄 유학시절 그녀에게 지어준 필명이다. 빼어난 문화적 재능을 가진 일엽이 태어난 해 요절한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의 이름을 따서 '한국의 일엽'이 되라 지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글또한 망상의 근원이라 가르친 만공선사의 뜻에 따라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그녀가 완전히 세속을 잊고 살아갈 때에 두명의 손님이 그녀를 찾아왔다. 나혜석과 아들 오타 마사오였다. 나혜석은 이혼의 아픔을 안고 김일엽을 찾아왔다. 몸도 마음도 지친 나혜석은 수덕사로 들어가지 않고, 이곳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심신이 지쳐있는 나혜석은 일엽을 보면서 불가에 귀의하려 했지만 일엽은 그같은 의지를 꺾었다. 승려가 되는 운명은 따로 있다는 점에서 나혜석을 만류한 셈이다. 

 

덕숭산에 위치해 있는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 뿐 아니라 나혜석과 김일엽이라는 세사람과의 인연으로 얽혀있는 곳이다. 이곳을 찾는다면 아름다워 보이는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를 외로움과 간절함이 밀려드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어쩌면 이들 세사람이 겪었던 인생역경이 고스란히 수덕여관에 베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해 보인다. 눈내린 덕숭산의 비경만큼이나 이들 세사람의 이야기를 접하는 것도 하나의 여행의 포인트가 아닐런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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