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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행사리뷰

살짜기옵서예, 로맨스멜로로 재탄생한 21세기형 '배비장전'

by 뷰티살롱 201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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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살짜기옵서예'는 토월극장 개관작으로 오는 3월 31일까지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살짜기옵서예'는 익히 알려져 있는 고전창극인 '배비장전'을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 흑백TV가 보급되던 1970~80년대를 살았던 중년들에게 인기있었던 장르는 마당극이나 창극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현대의 뮤지컬이나 오페라와는 달리 마당극은 영상매체인 영와나 TV 혹은 공연장이 대중들에게 많이 전파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특히 안방극장에서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여지는 영상세계 또한 총천연색을 자랑하는 현대의 TV와는 달리 흑백영상이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해 보인다.

영상기술의 발달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빠르기도 하다. 불과 30~4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영화와 TV의 영상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비교해 볼때 발전속도가 너무도 빠르기만 하다. 이런 말 한다면 아마도 현대의 스마트폰의 기술은 어떠한가라며 얘기하는 사람들도 적지않을 법하다. 휴대전화의 발달이야 말로 어머어머한 진보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토월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살짜기옵서예'는 21세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재탄생되어진 모습인데, 어떤 부분들일까? 어릴적 마당극으로 명절때에 코미디언들이 공연하던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했었는데, 제주기생 애랑과 배비장의 내기한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학과 풍자가 객석의 관객의 웃음소리를 끊이지 않게 한 작품이기도 했다.


배우 홍광호가 배비장역을 맡은 시간에 관람하게 되었는데, 뮤지컬은 TV나 영화와는 달리 매 회마다 관객이 느끼는 감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출연진이 다르고 녹화가 아닌 무대작품이기에 매회마다 배우들의 감정전달과 노래, 안무 등은 완전히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뮤지컬이나 오페라에서는 맛볼수 있는 특징이기도 할 듯하다.

원작인 배비장전은 제주목사와 함께 제주도를 찾은 배비장의 곧은 행동과 절기를 못마땅하게 여긴 제주현감이 애랑과 공모해 배비장을 타락시키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이같은 작품을 보면서 배비장전에 숨어있는 해학과 풍자를 알지 못하는 관객들은 머리를 갸우뚱거릴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지극히 공명정대하고 올바른 선비를 타락시키는 제주현감의 행동이나 혹은 죽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는 배비장의 마음을 기생이 무너뜨린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못마땅한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배비장전속에 등장하는 배비장과 제주기생 애랑, 제주현감의 타락성에는 원작이 만들어졌던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풍자한 것이라 볼수 있다. 유교사상에 빠져있던 양반들을 비꼬는 해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 바로 배비장전이라는 것이다.

'살짜기옵서예'는 양반들의 음담가무에 빠져있는 세계를 비꼬기보다는 21세기형 로맨스멜로로 재탄생한 모습이기도 했다. 제주목사와 배비장의 관계는 양반사회를 해부해 적나라한 풍자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제주목사는 정무에 대한 관심보다는 제주기생들과 놀아나는 것에 빠지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다.


다른 아전들과 어울려 뱃놀이를 즐기며 가무를 즐기는 모습은 당시 조선시대의 양반들의 비틀어진 시대를 풍자하고 있기도 하다.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긴수염을 쓰다듬으며, 꽁무니에 불이 붙어도 절대 뛰지 않는다는 것이 소위 양반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를 질타하는 것이 배비장이기도 하다.

고로 배비장과 제주목사의 관계는 흡사 탐관오리와 감찰자의 관계라 할 많다. 수포동 폭포에서 맞은 제주목사는 다른 관료들과 기생들의 치마폭에 빠져 음주가무를 즐기지만, 배비방은 그들을 향해 관료의 신분으로써 멀리해야 하는 마음과 행동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반의 시선으로 배비장의 지절과 지조는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들의 세계에서 본다면 기득권층으로서 누려야 할 부와 권력을 마음껏 누려야 하지만 배비장은 한마리의 고귀한 학과같이 그들의 행동을 질타하고 어울리려 하지 않으니 눈엣가시같은 존재이기만 할 것이다.

배비장전이 풍자와 해학의 최고라 여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배비장을 둘러싸고 두개의 세계에 대한 시선이 서로 다르게 교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제주목사와 배비장과의 관계가 첫번째이고, 배비장과 애랑과의 관계가 두번째이다. 또 배비장과 방자의 관계가 세번째이고, 네번째는 애랑과 제주목사의 관계일 것이다. 이들 네개의 관계는 양반세계와 하층민 세계라는 두개의 세계를 극명하게 대조시켜 놓고 해악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음주가무에 즐기는 제주목사와 배비장의 관계는 양반의 세계에 대한 대표적인 풍자를 담고 있다. 절제와 풍류라는 관계에서 양반들의 숨겨져 있는 유교적 세계에 질타를 보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배비장의 눈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배비장과 방자의 관계에서 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방자의 눈에 배비장의 곧은 선비같은 세계는 단지 또다른 제주목사나 다름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 양반의 유교적 행동의 하나일 뿐이다. 이를 해학적으로 풍자시켜 놓은 것이 배비장이 애랑에게 마음을 빼앗겨 집으로 찾아가는 대목에서 개가죽을 뒤집어쓰게 되는 대목일 법하다. 온갖 예와 행동으로 자신을 숨기는 양반들의 모습은 단지 허세일 뿐이라는 일종의 풍자라 할 수 있어 보인다.


배비장전에서 주인공은 방자라 할만하다. 제주목사와 애랑은 대쪽같은 성품을 지니며 지절을 지키려 하는 배비장의 마음을 무너뜨리자며 내기를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배비장을 타락시키는 일등공신이 방자이기 때문이다. 방자는 수포동으로 배비장을 꼬여내어 늦은 밤 나들이를 가게 만들고, 우연처럼 애랑을 만나게 해준다.

죽은 아내와의 약속, 혹은 늙으신 어머니와의 약속으로 여자를 멀리하고 곧은 관료가 되겠다고 약속한 배지장이지만 방자의 간교한 계략으로 애랑에게 빠져들게 되었으니 이는 엄밀히 양반이 하층민에게 무릎을 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볼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곧은 성품의 선비를 타락시키려 한다는 주제의식으로만 본다면 '배비장전'은 원성을 듣게 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흔히 조선시대 민간에서 인기를 끌었던 탈춤의 풍자를 생각해본다면 조선시대를 풍자하는 뮤지컬이나 다름없었던 창극이 아닌가!

탈춤은 양반과 기생, 일반 상민들의 모습이 웃는 탈로 양반세계를 조롱한다. 천만관객을 기록했던 영화 '왕의남자'나 '광해, 왕이된 남자'에서도 탈춤은 대표적인 양반세계를 풍자하고 나선다. 기생의 치마폭에 빠져들기도 하는 직접적인 풍자를 보이고 있다면 '배비장전'은 은유적으로 양반들이 세상과 남녀의 정에 대해서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다.


제주목사와 제주에 온 배비장은 애랑에게 이빨까지 뽑히는 정비장의 모습을 질타한다. 애랑이라는 캐릭터는 대표적으로 양반들의 숨겨진 세계를 폭로하는 캐릭터라 할만하다. 겉으로는 예의와 절개를 운운하는 양반들이었지만 속내는 시커멓기만 하다. 정비장은 애랑에게 마음이 빼앗겨 도포를 몽땅 빼앗기고 급기야 이빨까지 내어주게 된다.

겉으로는 거드름을 피우는 양반들의 위선을 파헤치는 이는 애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제주목사와의 대결을 통해서 배비장을 꼬여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본격적인 해학적 시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제주기생이라는 신분은 환영받지 못하는 신분이다. 하층민 중에서도 기녀는 양반들의 거드름에 속절없이 치마폭을 내어주어야 하는 신분이니 어찌보면 가장 하층민의 하나라 할수 있다. 하지만 기녀들의 세계는 화려하다. 이는 겉으로 온갖 위세와 허풍으로 뭉쳐져 있는 양반들의 세계를 그대로 총자연색으로 도배시켜 놓은 것이라 할수 있으니 제주기생 애랑과 제주목사와의 내기는 위선과 진짜모습이 한 세상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기생 애랑은 배비장을 꼬여내기 위해서 방자에게 수포동 목표로 나들이를 나오도록 유도한다. 그리고는 수포동 폭포아래에서 목욕하게 되는데, 그 모습으로 배비장은 그동안 자신이 품어왔던 절개를 한꺼번에 내려놓게 된다. 배비장과 애랑의 관계는 양반의 세상을 풍자하기도 했었지만, 남녀의 사랑을 극대화시켜 놓은 대목이라 할 수 있을 법하다. 기생의 신분인 애랑과 양반의 신분인 배비장의 관계에서는 부부의 연이 맺어질리 만무하기만 하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신분의 차이는 사랑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포동 폭포아래에서 목욕하는 애랑의 모습을 보고 상투에 꽂혀있던 산호동곳을 버리게 되는 배비장의 모습이란 남녀의 사랑이 한낮 죽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하는 절개가 아닌 그리움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시대가 어떠했었던가. 여성들은 죽은 지아비를 평생 그리워하며 홀로 살아야 했던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 여겼던 세상이었다. 나라에서는 이러한 여성을 두고 열녀문까지 하사할 정도였으니 정조와 절개는 양반사회에서는 가장 중요시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배비장의 절개를 꺾기위해서 시작된 애랑과 제주목사의 내기는 현대인들에게, 배비장전에 숨어있는 해학과 풍자를 모른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현대의 정치인들과 높은 관직에 있는 공직자들이 무더기로 비리에 연류되어 검찰수사를 받게 되는 소식들이 뉴스에 올라오는 현대의 사회상으로 본다면 곧은 절개를 지키려는 배비장을 타락시키려 하는 애랑과 제주목사의 은밀한 음모로 보여질 법하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어보인다. 검은 색깔이 흰 색깔의 소복을 물들이는 격이니 어찌 마냥 웃으며 볼 수 있겠는가.

배비장전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터라 '살짜기옵서예'는 창작뮤지컬으로써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1세기형 배비장전이 로맨틱멜로로 재탄생된 모습이라고 할까 싶기도 했다.

 
애랑에게 마음이 빼앗긴 배비장은 개가죽을 뒤집어 쓰고 늦은 밤 몰래 애랑의 집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애랑과 만나는 밤에 느닺없이 애랑의 남편이 찾아왔다면 혼비백산 놀라게 된다. 이는 방자에 의한 계략이었는데, 이 때문에 배비장은 궤짝안으로 몸을 숨긴다. 집에 들어온 남편, 사실은 방자가 되겠다. 남편은 집안의 기운이 상서롭지 못하다 여기며 그중에서도 궤짝이 잡안에 있어 불길한 기운들이 침입한다 여기며 그대로 도끼로 두동강을 내야 한다느니, 불에 태워야 한다면서 으름장을 놓고, 그말에 궤짝안에 숨어있던 배비장은 혼비백산 놀란다.

궤짝은 멀리 바다에 빠뜨려 없애기로 마음먹고 궤짝을 짊어지고 마을을 돌며 끝내 동헌마당에 이르게 되는데, 궤짝속에 숨어있던 배비장은 출렁이는 배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제주의 마을 사람들과 제주목사,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동헌마당에서 궤짝의 문이 열리고 알몸으로 헤엄치듯 빠져나오는 배비장의 모습에 모두가 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배비장은 모두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주기생 애랑이나 혹은 제주의 하층민인 백성들에게 배비장의 절개는 한낱 거드름을 피우는 양반의 또다른 모습이었으니 이는 어찌보면 배비장의 타락을 통해서 양반사회의 부조리를 꼬집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양반들이 시선에서 곧은 절개를 지키는 배비장의 성품은 그들이 동화시켜야 하는 또다른 부조리를 만드는 것이니 숨어있는 또하나의 풍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창작뮤지컬로 토월극장에서 공연되는 '살짜기옵서예'는 완성도높은 스토리와 웃음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작품속에 숨어있는 풍자와 해학을 알고 관람한다면 더 좋은 관람이 될 것이다. 필자가 관람했던 회차에서는 애랑역에 김선영과 배비장역에 홍광호, 제주목사에 배우 송영창이 열연한 무대였다.

산호동곳을 상투에 꽂아 죽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한 배비장의 지절과 그것을 꺾으려하는 제주목사와 애랑의 내기에 촛점이 맞추어져 배비장과 애랑의 로맨틱멜로가 절정을 이루어낸 모습으로 재탄생되어 있는 모습이었는데, 어릴적 TV의 마당극으로 방영되던 것을 떠올려보니 다른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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