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도 가까운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다산유적지는 복잡한 서울 시내에서 승용차로 3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강남이나 혹은 강북에서 출발하게 되면 팔당대교를 지나 10여분이면 걸리는 거리라며 주말이면 드라이브를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겠다.

 

과거에는 이곳 다산유적지가 개방돼 있었던 터라 쉽게 강가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여유를 즐기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관광지로 탈바꿈시켜 놓아서 번듯한 주차장을 구비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약용이라는 인물은 어떨까?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쩌면 드라마 '다산'에 잠깐 등장했던 궁궐 담장을 넘어서던 모습이기도 할 듯하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일생을 살았던 정조대왕과 인연이 많은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기도 하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정조와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주체가 돼 소개되었고, 정약용의 모습은 드라마 마지막 부분에서 깜짝 출연했던 인물이다.

 

 

다산이라는 호 만큼이나 정약용의 호는 알려진 바가 많다.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籜翁) 등의 호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다산'이라는 호가 현대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을 듯하다. 하지만 정약용 본인은 자신의 집필집에서 '사암'이라는 호를 많이 드러내 놓고 있기도 하다.

 

조선후기 실용주의 학자로 분류할 수 있는 정약용은 무거운 돌을 들어올릴 수 있는 '거중기'를 비롯해, 정조의 명으로 수원성을 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현대 군대에서 볼 수 있음직한 도하작전을 연상케하는 '배다리'를 창안해낸 인물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다산유적지에서 정약용의 실용적인 세계를 만나볼 수 있을 법하다.

 

다산유적지 주차장을 들어서면 눈에 띄는 정자가 보인다. 천일각이라는 정자다.

 

다산의 18년 강진 유배 생활중 1808년부터 10여년동안 거처하던 다산 초당에서 약 110m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정자로 이곳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심신을 달래고 소일했다고 한다.

 

초당 안에는 해배를 앞두고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려는 뜻에서 바위에 글자를 새겨 '정석과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크고 넓적한 바위에 다조, 바닷가의 돌을 주워 만든 작은 연못인 연지석가산, 그리고 다산이 손수 바위틈의 수맥을 찾아 만들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많은 물이 솟아난다는 약천이라 부르는 조그만 샘이 있는데, 이 모두를 다산4경이라 부른다.

 

 

다산유적지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은 사실상 유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집이다.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으로 집 앞에 내가 흐르고 집뒤에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이라고도 표현했다.

 

정약용의 호인 '여유'로도 알려져 있기도 한데, 호는 정약용이 1800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를 통해서 기록돼 있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도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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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의 말에 여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 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하거라 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깍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히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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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의미를 해득한 지가 6,7년이 된다. 당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두만두어 버렸었다. 추천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에 붙여놓고 아울러 이 이름붙인 이유를 기록해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개혁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와 함께 개혁의 아이콘이기도 해 보인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기반은 언제나 기존 세력가들인 권세가들에겐 공격의 대상이 된다.


다산 정약용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에는 정약용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해는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이 죽은 해이기도 했다.

 

 

이 무렵 정조는 정약용 선생을 무한 신뢰하고 있었으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광경으로 정약용이 판서가 되고 재상이 돼 제2의 채제공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던 때였다.

 

노론벽파는 정약용을 제거하려 했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1797년에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했고, 그 뒤 곡산부사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온 터였기 때문이다. 이에 노론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을 공격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는데, 이 사건으로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던 터라 정약용 역시 벼슬을 그만두고 관직을 그만두려 상소했다.

 

이에 정조는 만류했지만 정약용이 벼슬을 거부하자 그해 7월 26일에 이를 허락하게 된다.

 

다음해인 1800년 봄에 정약용은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했다.

 

다산은 유형원, 이익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했으며 북학파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했다. 조선시대의 인물들 중에 현재까지 회자되는 정약용의 문집은 일생동안 500여권이 넘는 저술과 2,700여수의 시를 남겼다. 가히 집필가로써는 손꼽히는 인물에 속한다 할 수 있겠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통해 실용적인 사례까지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까지도 귀감이 되는 저서들이 많다.  

 

 

여유당을 돌아 다산유적지의 생태공원으로 산책을 나서며, 과거 유배지에서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했던 정약용의 모습을 떠올려 보며 여유로운 시간속으로 빠져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에서 불과 30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서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풍광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를 만끽하기엔 주말 당일여행이 적격일 듯 하다. 더 멀리 양평이나 청평으로 길을 잡으려면 갈림길이니 고민될 법도 하다.

 

<재미있으셨다면 하트를 꾸욱~~>

Posted by 뷰티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