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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라

터널(2016), 무책임한 정부와 언론의 광기 '뭣시 중한디!'

by 뷰티살롱 201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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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배두나, 오달수 주연의 영화 '터널'을 보게 됐다. 21세기 최첨단 기술을 달리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다. 인터넷을 걸어다니면서 검색하고 유투브 동영상도 어디서든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첨단 과학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안전'이라는 부분에 대해선, 혹은 '책임'이라는 부분에 대해선 어떨까?

 

적잖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견고함도 지진 등의 천재지변이 일어나게 되면 어딘지 모르게 불안스레 여겨지는 게 현실이기도 해 보인다. 수십명의 인명을 죽게 했던 수많은 사고들을 돌아보면 사실상 그 이면에는 부실공사라는 팩트에 도달하고 얽히고 설켜있는 이권의 추악함을 지켜본 것이 얼마였던가 말이다.

 

영화 '터널'은 특별함이 존재했었다. 승용차를 타고 개통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도로를 따라 운전하던 정수는 터널을 지나게 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터널 안쪽에 갇혀버리고 만다. 구조가 언제될지 모르는 암흑의 터널 속에서 구조되기만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마음졸이게 되었을지 영화속에서는 촌철살인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지만 긴장감과 압박감을 느끼게 만든다.

 

언제 다시 무너져 내릴지 모를 무너진 터널안에서 자동차의 프레임에 가까스로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밖에는 허락되지 않는 어둠의 공간. 천우신조로 정우의 휴대폰은 외부와 통신할 수 있어 한가닥 희망을 끈이 생겨났다. 하지만 누구하나 자신이 터널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놀라하지 않았다. 119 구조반이 직접 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반신반의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영화 '터널'은 관객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코믹적인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이같은 코믹스러움 상황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위기상황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들이라 영화가 마치 코믹재난물로 보일 법도 해보였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왜 씁쓸한 쓴웃음이 가시기 않을까? 급기야 씁쓸한 웃음기는 분노로 바뀌게 되고 영화를 보는내내 울그락불그락 스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어 보인다.

 

 

구조해야 할 한명의 인간. 정우를 놓고 대책반과 방송, 언론은 앞다투어 최대 관심거리가 된 양 모여들었다. 정우의 아내인 세현(배두나)과의 기념촬영으로 내내 그녀의 손을 놓지 않는 지자체장의 모습은 언론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마치 홍보거리가 된 것처럼 스포트라이트에 정신이 팔려있을 뿐이다.

 

이같은 모습은 한 사람의 생존자를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오로지 '특종'이라는 명목하에 몰려든 언론의 군상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정우의 생존과 존재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구조작업을 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가 모호할지경으로 난색을 표하는 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누군가 '컷'을 외쳐야만 작업이 시작돼야 하는 상황이라니 얼마나 씁쓸한 모습이란 말인가.

 

현재 사회에서 영화 '터널'이 보여주고 있는 이같은 광기의 모습들은 100%의 싱크로율이 아니라 하더라도 주변이 늘 존재한다. 쉽게 말해 인기를 위해서 자신이 습득한 정보가 아니더라도 소위 신상털기 마라톤 레이스를 달리는 SNS의 행렬이나, 재미삼아 지나가는 사람을 카메라에 담아 조작된 거짓을 버젓이 올려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는 게 요즘의 세상이다.

 

언론이라고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마치 핵폭탄급 비밀을 터뜨려 놓은 것처럼 자극적인 재목의 기사들은 앞다투어 인터넷 뉴스란을 도배해 버리지만 사실상 기사자체는 그리 특별난 것도 없는 게 수두룩하기만 하다. 자신들의 매체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자극적인 제목을 달며 대중을 현혹하는 것이 새롭다 못해 이제는 일상처럼 돼 버린지 오래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의 모습은 어떨까? 국민들이 가장 못 믿어하는 부류가 이제는 정치인들이라는 말들이 있듯이 사건 사고가 이어질 때마다 책임론은 부거져 나오지만 정작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무너진 터널안에 갇힌 정우를 구하기 위해 구조작업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그 뒤를 수많은 드론으로 무장하며 따르는 언론의 광기는 과연 '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가 중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극을 위한 한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가까스로 굴착작업으로 정우가 갇혀있는 지점에 도달했지만, 그마저도 잘못된 설계상의 오류에 빠져버리게 된다. 올바른 정식이 아닌 편법과 부정으로 얼룩져버려 부실시공으로 이어진 터널공사 덕분에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의 굴착 구조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영화 '터널'은 마지막 한방을 관객들에게 선사해준다. 어쩌면 보는 내내 짖눌려 있던 압박감과 구도유발을 만들어내내 호흡곤란이 대경의 입밖으로 터져나온다. 단 세마디가 전부였었고, 그 말은 관객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준 말이기도 해 보였다.

 

그래 요즘 유행하는 말로 '뮛시 중한디' 라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가 '터널'이다. 기본이 사라지고 정직은 모습을 갖춘 세상. 곱게 차려입은 이중성의 인간들이 오히려 대접받는 세상이 영화 '터널'에 가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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